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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2월 05일
“왜 범죄소설이라는 특정한 문학장르의 역사에 부르주아사회의 역사가 반영되고 있느냐고 질문한다면…부르주아사회가 범죄사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ꡔ즐거운 살인ꡕ은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다. 우선 저자가 ‘만델’이라는 것. 그는 맑스주의 경제학자이자 트로츠키주의자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ꡔ후기 자본주의ꡕ는 정치경제학의 고전으로 널리 손꼽힌다. 참고로 프레드릭 제임슨도 만델의 이론에 근거해 포스트모더니즘을 분석했다. 시장자본주의-리얼리즘, 독점자본주의-모더니즘, 후기자본주의-포스트모더니즘, 그의 3단계 문화이론도 여기에 근거한다. 그러한 만델이 ‘범죄소설’을 분석한 것이다. 맑스주의 경제학자와 범죄소설의 짝패란 얼마나 기묘한가. 자신도 겸연쩍었는지, “맑스주의자가 범죄소설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이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서문에 ‘변명’을 덧붙여 놓았다. “역사유물론은 모든 사회현상에 적용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변명이 아니다. 거의 선전포고처럼 들리며, 역사적 유물론이 얼마나 유효한 독법인지 강력하게 주장하고, 결국은 입증한다. 자그마치 1984년에 출간된 책에서 말이다. 사실 맑스주의미학은 오랫동안 대중문화를 경시했다. 이것은 전통적 맑스주의도 비판적 맑스주의도 같았다. 전자가 체제의 문제로 부정했다면, 후자는 의식의 문제로 비판했지만, 태도는 비슷했다. (이 공백은 나중에 영국의 문화연구와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이론이 등장하고 나서야 겨우 메울 수 있었다) 그러니 기묘할 수밖에. 골동품으로 전락한 역사적 유물론의 방법으로, 그 동안 무시했던 대중문화의 하위장르를, 정치경제학자가 천연덕스럽게 요리하는 솜씨라니. 그는 우선 전근대 악당소설과 근대의 범죄소설을 칼로 자르며, 저옛날 ‘고귀한 악당을 사악한 범죄자로 변모시킨 이유’로 자본주의체제를 지목한다. “사유재산에 반대하는 반역이 개인화되는 것이다. 반역자는 이제 그 사회적 의미를 잃은 채 도둑이나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새세상을 꿈꾸던 홍길동이 사유재산을 강탈하는 신창원으로 ‘전락’하는 순간. 범죄소설은 이런 식으로 범죄를 재현하고 단죄하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보전하는 것이다. 그 방식은 당연히 시대에 따라 범죄소설 형식에 반영됐다. 초기자본주의 시절 오귀스트 뒤팽은 접실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며 소소한 사건을 추적했지만, 1차 세계대전을 거친 후에 샘 스페이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는 무엇보다 부유층이 저지르는 사회 부패가 그 잔혹성과 더불어 플롯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부르주아적 가치 내에서 변화가 발생했고, 조직적인 갱이 등장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해결사가 처리할 대상은 부패만이 아니었다. 조직폭력이 활개할 때는 갱단에 침투해야 했고, 냉전시대에는 적지에 뛰어드는 첩보원이 되어야 했다. 범죄소설이 단순히 지배이데올로기만 뿌리는 것은 아니었다. 여느 예술이 그랬듯 성숙한 시기에 이르러, 사회자체를 비판적으로 응시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범죄를 갈수록 더욱 더 많이 저지를수록, 그 정의상 아주 순응적인 우리 시민들 역시 더욱 더 많은 범죄를 저질러야 한다.”(ꡔ대부ꡕ 해설집) 대부는 온화한 보호자며 자애로운 자선가에 모범적인 시민이자 충실한 가장이 아니던가. 그렇게 해서 ‘사회적 범죄’는 ‘범죄적 사회’와 별 다를 게 없어지고, 흉악한 범죄자를 갈음해 사악한 시민이 탄생하고야 만다. <주간한국>
2010년 02월 01일
![]() 잡음이 맞기는 했다. 듣기도 힘들었고 보기도 괴로웠다. 지각체계의 통제에 저항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익숙한 ‘문법’을 구멍을 뚫고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Text@Media Fest>의 대략적 과정을 생각해 보라. 문학을 공연으로 연출하고, 소리나 영상으로 변환하고, 그리고 다시 문자로 옮겨 놓고, 결국에는 전시로 끝을 낸다. 그러니 매우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이질적인 매체들로 여러 번에 걸쳐 전이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것만이 아니다. 전시장에 걸린 것은 <Text@Media Fest>의 결과물 밖에 없다. 따라서 사전에 진행된 프로젝트의 개념과 방식을 알지 못하면, 마치 암호처럼 눈과 귀를 교란시킬 따름이다. 결국, 관객은 탐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자 전시장은 사건의 현장으로 돌변한다. 그는 단서를 찾아 현장을 누비듯 설치된 작업을 탐색하고 추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말하지’ 않는다. 죽은 자가 말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말하지 않는 말, 그것은 곧 말의 주검이다. 다시 현장은 묘지로 일변한다. 사형선고의 위협은 예전부터 존재했다.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던 부류는 매튜 아놀드를 위시한 영국의 문화비평가들. “천박한 문화의 제왕들은 대중의 문화적 욕구를 착취하여 이익을 거두어들이면서 그들의 계급 법칙을 유지해 나간다.”(맥도날드) 그들은 대중문화를 혼란과 죄악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질도 떨어지는 것이 양의 논리에 따라 무차별 살포됐다는 것이다. 의식의 하양평준화는 불을 보듯 뻔했다. “즉 책・신문・삐라・각종 텍스트들은 값이 싸졌고, 그 결과 값싼 역사의식과 마찬가지로 값싼 개념적 사고방식으로 귀결되었다.”(플루서) 게다가 하나였던 문화를 두 개로 찢어 놓기까지, 끔찍할 정도였다. 그때부터였다.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이분법이 견고하게 기능했던 것은. 그들은 문학의 정전을 선별해 교육에 활용할 것을 주문하며, 문화적 질서를 보수하고자 헛되이 노력했다. 물론 당시에 아놀드 같은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위대는 그의 반대편에 서서, 새로운 매체의 잠재력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다다와 초현실주의는 예술적 난동에 사회적 전망을 비벼냈고, 러시아의 미래파는 신사회 건설에 혁신된 매체를 녹여냈다. <Text@Media Fest>가 전위대의 실험을 언급한 것은 그래서 타당하다. 매체가 일으킨 문화의 지각변동에 기존의 예술형식은 어떻게 반응하고 적응하고 돌파할 것인가, 전범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의 태도는 완연히 달랐다. 전자는 기존의 예술형식을 포기하지 않고서, 그 안에 새매체의 잠재력을 담고자 애썼다. “다다이즘은 대중이 오늘날 영화에서 찾고 있는 효과를 회화나 문학의 수단으로 산출하고자 했다.”(벤야민) 당연히 기괴한 야만의 기운이 넘칠 수밖에. 말그댈 강철로 만드는 ‘철마’를 상상해 보라. 반면에 미래파는 기존의 형식에 연연하지 않고, 새매체의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충돌시켜 포토몽타주 형식을 새로 고안했던 것을 상기하자. 그들은 문학과 화면의 내부에 결코 갇히지 않았다. <Text@Media Fest>는 그러면 어떠한 전략에 가까울까. 성기완이 선택한 전략은 지적대로 ‘잡음’이다. 우선, 잡음은 화음과도 다르다. 화음은 자연적 조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고전음악은 일찍이 자연의 소리를 모방했다. 다음, 생음과도 다르다.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위음악은 사진이 찍고 집는 것처럼 소리를 수집했다. 잡음은 화음과 생음에, 자연과 발견에 이중으로 대립한다. 인공적으로 조작하는 것, 매체의 충돌이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은 컬트로서 그리고 정보는 물신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볼츠) 잡음은 신화적 담론에 올라선 ‘소통과 정보’에 구멍을 뚫는다. 장르의 경계와 공간의 안팎을 교란하고(성기완과 구동회), 텍스트를 제물로 삼아 살해하고 요리하고(한유주와 이준), 시를 알고리즘에 따라 해상도로 분해한다(심보선과 이태한). 그것은 성찰적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체의 (재)매개가 작가의 형상화를 갈음한 탓에, 작가는 매개기능의 ‘마디’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신의 말을 전하고 담았던 ‘무당medium’처럼 말이다―신의 말씀과 프로그램의 코드는 인간에게 똑같이 블랙박스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시대착오다. 텍스트의 역사적・선형적 서술을 포기하고, 매체의 매개적・순환적 번역을 일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나타난 시대의 징후다. 시간과 개념이 얽힌다는 것. 그것은 역사의 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개념의 정합성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역사를 끝장낸 매체시대의 성찰적 주술행위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역설적인 일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목격한 것일지 모른다. <월간미술> 2월호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2010년 0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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