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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3월 01일
![]() 모든 작품이 쓸만한 생각을 끌어내고 쓰고픈 욕망을 뒤흔들진 않는다. 어떤 것은 평판은 높지만 무색할 정도로 마음을 끌지 못하고, 어떤 것은 보는 순간 눈길을 잡고서 놔주지를 않는다. 물론, 쓰고 싶다고 쉬운 것도 아니요, 쓰고 싶지 않다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성격만 다를 뿐, 둘 다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비유컨대, 앞쪽이 구멍 같은 걸림돌이라면, 뒤쪽은 껍질 같은 걸림돌이리라. 구멍에 빠지면 허우적대지만, 껍질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앞에 것을 생산적 난점으로, 뒤에 것을 소모적 난점으로 불러도 되겠다. <아뜰리에 사람들IV>는 그런 점에서 특이하고 기묘하다. 보기에 어느 쪽도 아닌 듯하기 때문이다. 작품만 생각하면 분명히 깨라는 껍질처럼 보인다. 모든 작품이 좋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생각할 단초를 제공하고 새로운 감각을 자극하는 작업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를 고려하면 허우적대는 구멍처럼 보인다. 다채롭고 화려했지만, 전체를 꿰뚫는 매가리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아닌가. 이렇다 보니, 내용과 형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생산과 소모 사이에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것도 서로가 불리하게 충돌하는 탓에, 글쓰기가 제곱으로 괴로워진다. 그래도 눈만은 행복했다. 하나같이 자신만의 세계를 뽐내며 주의를 끄는 등, 감각의 아우성이었다. 어떤 것은 시각과 촉각을 동시에 교묘히 희롱하며(박은선), 어떤 것은 일상을 질료로 개념을 논리적으로 구축하고(안규철), 어떤 것은 역사적인 현장을 비역사적 풍경으로 탈바꿈시키며(김아타), 어떤 것은 하이테크적 형식의 우회로를 통해서 로우테크적 내용으로 돌아간다(양만기). 이 가운데 특히 홍경택의 작업은 직접 볼수록 발군이었다. 성화와 매체가 만나자, 더할 나위 없이 야릇한 분위기가 피어나왔다. 성화와 매체는 보기에 따라서 형식도 되고 내용도 되어, 현대 매체문화의 ‘신위’를 암암리에 드러냈다. 더불어 이상현의 작품도 만만치 않았다. 홍경택의 작품과 비슷한 계열이지만, 성과 속의 교묘한 얽힘은 사진형식에서 더욱 강렬하게 약동했다. 오늘날 예술이라는 창문에 비치는 바깥의 정체가 무엇인지 되새겨 볼만했다. 이들 모두, 솔직히 일년 족히 발품을 팔지 않으면, 챙겨보기 힘든 작가요 작업이다. 한번에 볼 수 있으니 여북하게 즐거웠다. 게다가, 이들이 현재 미술계에 차지하는 자리를 생각해 보면, 즐거움을 넘어서 당대의 예술적 감수성을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생각해도 충분하리라. 허리세대이자 주도작가이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작품들 모두 형식과 내용을 가리지 않고서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흩날리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난반사한다고 할까. 다채로운 빛깔들이 작품들 사이를 너무나 멀리 떼어놓았기 때문에, 당연히 사유와 감각을 뚝뚝 끊어먹는다. 그것들을 잇고 있는 매개가 없는 것이다. 달아오른 두 눈은 순식간에 가라앉고, 다음에 씹히는 뒷맛은 씁쓸할 수밖에. 마치 텔레비전채널을 쉴 새 없이 돌리는 과정에서, 보았던 내용은 사라지고 돌리는 손짓만 남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이 전시는 입주작가의 ‘졸업’전이다. 따라서, 지적한 문제는 예정된 한계이기 때문에, 부당한 비판으로 비칠 만도 하겠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이 같은 비판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전시는 일정한 개념을 기초로 기획한 전시가 아니라, 한국의 상업미술을 주도하는 가나아트의 ‘브랜드’ 전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마케팅’의 문제가 된다. 행여나 오해할까 말하지만, ‘브랜드’니 ‘마케팅’이니 한다고 역정 내진 말기를 바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상품이 되는 과정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어떤 존재도 상품으로 등록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더구나, 여전히 낙후한 한국의 미술계를 생각해보면, 쌍수를 들어서 환영해야 하는 일이다. 공간만 파는 것이 사용가치의 수준이고(전자본주의), 작업도 판다면 교환가치의 수준이라면(자본주의), 브랜드로 판다면 상징가치의 수준일 것이다(후기자본주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에서 여전히 진자운동만 거듭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가나아트의 공격적 행로는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만스러웠다. 속내를 들여다보니, 반짝반짝 ‘종합선물세트’ 같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현대는 시대와 호흡하는 양식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다. 새로운 나쁜 것, 유행‘들’이 양식을 대체한다. 유행이란 결국 자본의 회전율을 높이는 상징적 장치인데, 기존의 예술도 대중문화와 다른 방식으로 유행을 창출해가며 교환체계를 재생산한다. 현실과 단절된 예술이 자본에 포획되는 방식인 셈이다. 허나, 유행에도 엄연히 ‘약호’가 존재한다. 파리와 뉴욕에 바람이 어떤 식으로 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방향을 잡아서 부는 바람이다. “바보들만 하나도 안 버리려다가 다 버린다.”(김현) 어쩌면 지금이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새로운 유행을 찾아서 생산할 생각은 안 하고, 한국산 ‘명품’이라면 입도선매하겠다는 생각은 아무리 봐도 저차원적 마케팅전략이다. 가나아트가 욕심이 과한 것인지, 한국미술계가 그 정도로 폭이 좋은 것인지, 어느 쪽이나 안 됐기는 마찬가지다. <아트인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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