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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24일
![]() 이상하지 않은 나라의 관람객이 대안 공간 휴에서 조우하는 장면 둘. 구경거리를 찾아 헤매 이녁 저녁 흘러들어온 그/녀는 일순 혼란에 빠져 들어간다. 느긋하게 지긋하게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방송중이라는 ‘On Air’란 간판에, 들쭉날쭉한 ‘CODE’의 약호만이, 심드렁하게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음악을 들으러 연주장에 갔더니만, 말없는 침묵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침묵만이라면 어쩌면 다행일지 모른다. 우롱하기라도 하듯, 소리를 대신해 침묵하는 이미지가 버티고 있다면,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일 것이다. 휴의 <라디오 휴>는 그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관람객을 일순간에 청중으로 만들어 놓고서, 시각을 무력화시켜 버린다. 한 마디로, ‘익숙한 지각의 문법’을 교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렇기 때문에, 이 텍스트의 내용을 규명하는 것은 자칫 엉뚱한 곳에 화살을 날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내용이 형식을 은폐하는 알리바이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내용이 너무 뻔뻔해서일까, 형식이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에드가 앨런 포의 ꡔ도둑맞은 편지ꡕ에서 영악한 수상이 훔친 편지를 숨기기는커녕, 반대로 뻔히 보이는 곳에 던져 놓은 것처럼 말이다. 편지는 그 자리에 있지만, 또한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말 중요한 것, ‘지각의 교란’ 자체는 발화되는 텍스트 때문에 순식간에 증발돼 버린다. 아주 잠깐 고개를 갸우뚱했다가, 이내 텍스트의 목소리에 묻혀 버리고야 만다. 물론, 텍스트의 내용에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미술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용만 섭취할 거라면, 빡빡하게 기록된 대화만 참고해도 충분하다. 이곳에 안 와도 된다는 것이다. 또한, ‘Seoul Art Scene’을 들추어낸다고는 하지만, 질문의 면면을 살펴보면, 미심쩍은 구석이 역력하다. 생뚱맞게 등장하는 ‘성공의 기준’ 같은 질문은 아예 노골적으로 텍스트의 진의를 믿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언뜻 체계적으로 사람들을 정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작위 닥치는 대로 만난 게 역력한 점도 비슷한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정말로 미술계의 풍경을 정밀하게 해부하려고 했다면, 논문을 본다든지 포럼을 간다든지, 얼마든지 대체할 것들이 한 무더기일 것이다. 그것을 왜 이곳에서 이런 방식으로 하고 있는가. 풍경의 해부는커녕, 낯간지럽게 부채질이나 하는 꼴인 셈이다. 결국, 이곳에 ‘Seoul Art Scene’은 부재하다. 볼 것을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무엇인가 보려고 이곳에 들어 와서, 듣고 가야만 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쉼표 사이에 잠깐 솟구치는 ‘머뭇거림’이 핵심이다. 끝내며 덧붙이는 한 마디. 주지하다시피, 미술관은 일종의 시체 보관소다. 아름답게 염을 해서, 밀랍인형처럼 곱게 포장해 살아있는 시체들을 걸어놓고 있는 공간이다. 생생한 삶의 맥락에서 박제되어, 고인의 영정 사진처럼 그곳에 걸려 있다. 그래서일까. 무엇인가 볼 게 있어야 마땅한 공간에서, 미술계를 논평하는 <라디오 휴>의 목소리들은 어쩐지 무겁지 않은 장송곡을 닮아있다. 볼거리가 없는 미술관에서 미술계의 목소리로 채색된 소리의 풍경은 ‘Danger Museum’과 흥미롭게 공명하고 있다. <월간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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