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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6월 24일
![]() 불 현듯 떠오르는 생각, 왜 저런 것을 찍었을까. 초점은 ‘찍었을까’에 있지 않다. 주어인 ‘저런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저렇게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무엇을 어떻게 무슨 까닭에 만들었는지 주억거리게 된다. 이 점은 사진전의 이름인 ‘모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모래가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제를 분류하자면, 일상대상과 자연대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별반 중요하지는 않다. 초점은 그저 질료 그 자체다. ‘모래로 빚은’ 형상이지, 모래로 빚은 ‘형상’이 아니란 이야기다. 그런데 가만, 저절로 고개가 갸우뚱거리기 시작한다. 사진을 보는데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고민을 한다고? 이 지점에서 ‘사진’이 움츠러든 까닭이 또렷해진다. ‘ 찍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보았을까.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찍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날처럼 무엇인가 기념하려고 찍는 것이 아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사진을 무참하게 찍어대고 토해내는 실정이다. 이 과정에서 사진을 둘러싼 지형이 완전히 뒤흔들려 버렸다. 양질전화란 말이 정확히 적용되는 국면이다. 더군다나, 워낙 카메라기술이 날로 발전한 탓에, 사진 자체만으로 도무지 사진들을 선별・분류할 여지가 극히 희미해졌다. 풍전등화의 운명에 공히 빠져든 ‘작품’과 ‘작가.’ 질료 자체를 드러내려 하고, 사진을 대형으로 하고, 어쩌면 당연하게 보인다. 그런데 매우 익숙한 길이다. 일찍이 모더니즘회화가 걸었던 길이요, 결국에 실패했던 길이 아니던가. 역사의 아이러니다. 상당부분 사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화가 선택했던 방식을, 사진이 걷고 있다니. 모래를 씹는 것처럼, 입안이 텁텁하다. <아트인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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