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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4월 24일
![]() 그런데, 덧붙인 조각을 뜯으면 무엇이 있을까, 솔직히 그것이 궁금했다. 혹시나 구멍이 뻥하니 뚫려 있지는 않을까, 못내 두렵기도 했고, 아니면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지는 않을까, 살짝 열어보고 싶기도 했다. 물론, 허황된 몽상이리라. 뜯어내면 사진밖에 없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운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보통 그대로 사진이었다면,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사진이 사진이 아니었던 탓이요, 표면이 표면이 아니었던 때문이다. 잠자코 붙박혀 있어야 마땅할 표면이, 불끈 꿈틀대며, 일어서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것도 거침없이, 나 사진이요, 선언이라도 하듯, 그런데 표면은 아니요, 배경을 뒤로 밀쳐낸다. 정확히 이때 불온한 긴장이 발생한다. 사진은 사진대로, 세계는 세계대로, 더불어 서로 맺고 있던 관계가 엉클어지기 시작한다. 일찍이 사진은 현실의 충실한 기록으로 인정받았다. 완전한 리얼리즘의 신화가 드디어 현실이 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진과 세계는 드디어 행복한 짝패를 만난 것 같았으리라. 하지만, 포토리얼리즘은 이 같은 공모가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보여준다.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듯하지만, 정작 찍힌 세계는 뒤로 밀려난 채, 표면만이 반짝이는 것이다. 사진은 깊이를 제거하고 표면만을 반사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진에 반사되는 무엇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홍성도의 작업은 이러한 ‘사진의 시각적 무의식’을 정확히 짚어낸다. 하지만, 그는 한결 과격하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에서 사진과 세계는 차원이 반대로 역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표면은 깊이가 되어 있고, 깊이는 표면이 되어 있는 탓에, 극명하게 서로가 서로를 낯설게 만든다. 솟구쳐오른 사진과 말라붙어버린 세계의 만남, 이리하여 완전한 리얼리즘의 신화는 미망이 되고야 말았다. 단지 사진 하나 덧댔을 뿐이나, 사진은 진실을, 세계는 깊이를, 저마다 잃어버린다. <월간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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