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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8월 25일
![]() 짐 짓 보기에 <맛닿은 두개의 방>은 정연하다. 마치 두 개의 방은 다른 공간이라고, 안쪽은 들어간 곳이요 바깥쪽은 나온 곳이라고, 역설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쪽은 하얗고 한쪽은 까맣게, 한쪽은 중앙에 한쪽은 가새로, 한쪽은 펼쳐놓고 한쪽은 얹어놓고, 하는 식으로 범주를 달리해 체계적으로 배치해 놓았다. 하지만, 범주는 보기보다 완전치 못하다. 두 곳은 훤하게 연결돼 있으며, 두 곳의 질료도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두 곳을 문턱이 갈라놓곤 있지만, 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기에, 둘이라고도 한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질료의 상황도 비슷하다. 타자기 종이로 ‘화장지’가 쓰이고 있을뿐더러, 턱하니 걸려 있는 옷자락은 새하얀 ‘임신복’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바깥을 의미하는 것은 없다. 임신복은 실내복이지 실외복이 아니며, 바깥으로 나간다쳐도 밀림 같은 세상을 헤쳐가기에 형편없이 나약한 갑옷일 뿐이다. 게다가, 안쪽 방 수많은 상자에 숨겨둔 비수들, 바깥을 겨누어야 마땅해 보이는 무기는, 바짝 벼려져 있지만, 상자의 상자에 안쪽의 안쪽에 숨겨져 있다. 쓰지 않은 것일까, 쓰지 못한 것일까. 전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여유롭고, 후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하다. 전 통적인 범주로 봤을 때, 바깥은 세계요 안쪽은 주체다. 하지만, <맛닿은 두 개의 방>에서 바깥은 바깥이 아니다. 바깥의 형상을 빌리곤 있지만, 뒤섞여 있거나 기능이 제로다. 바깥마저 안으로 말려들어가 있는 탓에, 결국 갇혀버린 것이다. 하기사, 태초부터 ‘그녀’에게 세상을 볼만한 창문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출구 없는 미로, 딱 그 짝이다. <아트인컬쳐>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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