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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6월 25일
![]() 이때 발생하는 흥미로운 현상 한 가지. 밖에서든 안에서든 매체의 폭격에 노출된 탓에, 의식은 물론이거니와 무의식까지, 인공이 뿌려대는 기호들이 사로잡아 버린다는 것. 내용만이 문제가 아니다. 형식까지 주물러 놨기 때문에, 아예 입맛의 기준이 바뀌어 버린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영상, 우리가 듣는 소리, 언뜻 어지러운 채 그대로, 주체에게 구조로 형식으로 새겨지게 된다. 영상이든 음향이든 가가거겨 무엇이 됐든, 온갖 것들이 아무런 맥락 없이 끼어드는 그대로다. 억압하고 규율하는 형식에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낭만주의의 꿈은, 어쩌면 이 ‘빌어먹을’ 영상시대에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형식은커녕, 관계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때가 많은 탓이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이제는 정말로 ‘혼돈’이 ‘질서’가 된 게 아닐까. 흩어졌다 뭉쳤다 하는 문자형상들, 별반 관계 없는 영상들의 이지러짐, 의도가 있는 듯 없는 듯 흩어진 텔레비전들 등등, 이필두의 <To Freedom>이 익숙해 보인다면, 바로 이 때문이리라. 텍스트가 다루는 질료가 무엇이든 아무 관계없이, 오늘날 시각의 영역을 구성하는 영상들의 이지러지는 잔영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기 때문이리라(솔직히 이필두의 영상작업에 등장하는 문자가 과연 ‘문자의 의미’가 있는지, 소통의 문제를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자유’라는 표제는 절묘하게 생뚱맞아 보인다. 하기야, 문자에서 자유롭다면 자유로울지 모르겠다만). 더도 덜도 아닌 그대로. 별로 색다르지 않아 보이고, 별반 어렵지 않게 ‘수용’된다. 이때 수용‘된다’고 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언뜻 어지럽게 이지러지는 영상들은, 좀체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해석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SK텔레콤의 광고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해석을 거부하는 게 아닌 것이다. <To Freedom>도 마찬가지다. 문자가 운동하며 형상을 만들고, 이런저런 영상들이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그렇게 ‘흘러감’만이 남을 뿐, 무엇이라곤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반대로 기억나게 형성되어 있지도 않다. 예를 들어 보자.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리모콘을 돌려가며 멍하니 볼 때처럼, 온종일 텔레비전을 리모콘으로 돌려가며 이것저것 맥락을 무시하며 짜깁기해서, 무엇인가 만들었다고 치자. 오늘날 현대 시청자는 텔레비전이 뿌려대는 영상들을 ‘해석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다. 아니, 정확히 그럴 필요가 없다. 그저 익숙한 대로, 보던 그대로, 반복하면 그만이다. 시각의 무의식은 그렇게 새겨지고 사로잡힌다. 하지만, 유념해야 한다, 익숙하다는 것의 의미를.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여행은 ‘아찔’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기차 여행할 때 어지러워하는 사람은 어린아이 밖에 없다. 적어도 신경과민한 사람이 KTX 정도를 타야 어지럼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봐야 한다. 익숙함에 침투해 들어온 것,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한가지 덧붙이는 말. “이번 전시에 보여지는 영상작업은 거창하게는 현시대 상호소통의 부재, 커뮤니케이션 단절에 대한 상실의 노래이며, 작게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현학적 언어로 대중을 우매화하고 호도하는 고급미술의 권력에 대한 비판적 진술이다…여기서 나의 작업이 미의 위계구조를 파괴하고 전복시키고자하는 아방가르드적인 시도가 아니라, 다만 폭력적이지 않고 가볍게 읽혀지는 평범한 작업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솔직해지자. 외교관이나 쓸 법한 이런 말은 안하는 게 좋지 않을까. 현학적인 언어로 ‘현학적인 언어’를 비판하고, 일치감치 제도로 들어간 영상설치로 있는지 없는지 희미한 ‘고급미술의 권력’을 겨누어봐야, 누워서 침 뱉기일 뿐이다. 무딘 칼로 허수아비를 베는 일은 그만하자. <앨리스온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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