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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8월 25일
![]() 하지만 현실에서 담론이 돌아가는 꼴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우선 용어만 해도 그렇다. 매체예술이란 용어도 앞서 지적한 문제 때문인지, 다른 문제 때문인지, 하여튼 요즘에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못하는 실정이라, 엇비슷한 경쟁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미디어아트, 인터넷아트, 넷아트, 웹아트, 원격현전예술, 디지털예술, 뉴미디어(아트) 등등, 이름만 들어도 아찔할 정도로 신조어들이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탄생할 때마다, 두 손 벌리고 제일 먼저 받아 안고서, 부리나케 ‘예술’을 붙여대는 형국이다. 물론, 단순히 새로운 용어가 늘어난다고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현실의 변화를 감지하는 지진계 노릇을 훌륭하게 하고 있다고 볼만도 하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새로운 용어들이 오묘한 매력을 듬뿍 발산하는 만큼, 과연 그만한 의미가 있는지 속단하기 어려운 탓이다. 게다가, 용어들이 늘어나는 만큼, 그에 걸맞는 현상이 얼마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문제가 심각하다면 심각할 수 있는 것이, 파이어아벤트의 말처럼 “뭐든지 좋다”는 식이 아니라면, 용어들 사이에 별다른 차이 없이, 쓰는 사람의 입맛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으리라. 어떻게 생각하면, 이 혼란 아닌 혼란을 구태여 정리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날래게 변이하는 현실을, 무거운 이론으로 올가미를 씌우는 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푸르고, 이론은 잿빛이지 않은가. 항상 그렇듯, 이론의 무능은 예정된 결과요 숙명의 업일지 모른다. 하지만 무딘 칼이라도, 칼은 칼이다. 현실의 다채로운 현상을, 담론의 무책임한 상황을, 제대로 맞설 수 있을지 몰라도, 이론은 항상 그곳과 마주서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간의 실마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매체예술을 설명할 때, 항상 반복되는 몇 가지 개념들이 있다. 상호작용성, 컴퓨터, 디지털 등등. 특히, 상호작용성은 매체예술을 들먹일 때마다 등장하는 ‘만능열쇠’다. 매체예술을 정의하는 필요충분조건으로 자리매김되어, 매체예술하면 상호작용이고, 상호작용하면 매체예술이 될 정도다. 물론, ‘상호작용’의 함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 미학의 전통적인 개념으로 풀어본다면, ‘미적 거리’의 문제가 된다. 두말할 여지없이, 작품과 거리가 있어야만, 멀찍이 관조할 조건이 마련된다. 따라서, 거리는 작품의 존재조건으로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허나, 상호작용은 이 ‘거리’를 무너뜨린다. 관객이 관조할 거리를 주지 않은 채, 오히려 들어와 놀라고 손짓한다. 그래야만, 작품과 만나서 대화할 수 있다고 속삭인다. 당연히 ‘작품의 한계’와 ‘주체(작가)의 능력’이 걸려 넘어질 수밖에. (이러한 공세를 받고서, 모더니즘은 영웅적인 전쟁을 벌였지만,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여기에, 온갖 ‘포스트’ 담론의 세례를 뒤집어씌우면, 만사형통이다. 사유 대신 언어를 놓든지, 의식 대신 무의식을 밀든지 어찌 됐든, 주체(작가)를 죽여 버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익숙한 ‘저자의 죽음’과 ‘관객의 참여’ 문제가 발생한다. 저자가 없을뿐더러, 관객이 작품에 내재한다는 이야기다. 철학의 입장에서나, 미학의 입장에서나, 논쟁의 여지가 만만치 않는 테제들이다. 문제는 일찍이 매체예술이 등장하기 앞서, 전위주의가 이 같은 면모를 예전에 보여줬다는 점이다. 뒤샹과 같은 전위주의자들이 거의 100년 전부터 두들겨 부수고자 했던 생각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전위주의와 매체예술 같은 것의 차이는 단 한 가지, ‘기술’밖에 없다. 결국, 컴퓨터나 디지털이라는 얘기다. 이러다 보니, 매체예술 담론을 볼라치면, 기술혁명만으로 작품의 성패가 갈라지거나, 예술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보는 담론이 난무하게 된다. 테크노피아나 디스토피아 같은 숙명론이 판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상호작용체계를 통해 자유를 창조하고 통제를 창조한다는 생각 둘 다 기술의 참된 힘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지식기계, 즉 기계장치로 내려오는 신deus ex machina을 고대하는 것만을 발전시킬 따름이다”(Reisman). 매체담론에서 요즘 한껏 주가를 높이는 이론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매트릭스의 재배체계를 저주하는 묵시론을 주장하는 보드리야르나, 최첨단 기술로 정신을 증류해 가상세계에 업로딩시켜 잘 살아보자는 모라벡이나, 똑같다.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오직 ‘기술’만이 결정한다. 그네들의 사유회로는 딱 거기서, 폐쇄된다. 아예 기술물신주의라고 해야 할 판이다. 기술의 힘은 인정돼야 하지만, 그것을 ‘결정적’ 요인으로 간주해선 곤란하다. 무엇인가 다른 식으로 문제를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물감의 발명으로 인상주의를 설명하는 것처럼, 어리석게 분석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사유하고, 그래서 ‘매체예술’을 일종의 징후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장구한 예술의 역사를 살펴볼 때, 예술의 ‘바깥’으로 어떤 존재들이 설정됐는지, 그렇게 설정한 역사적 현실이 어떠했고 어떤 단계로 운동했는지, 물어야 한다. 그래야만, 예술의 ‘바깥’으로 무엇이 들어섰고, 어떤 식으로 예술의 존재와 개념이 변화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신, 역사, 주체, 예술 자신 등등, 쟁쟁한 존재들을 밀어낸 것은, 적어도 ‘기술’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기술은 기껏해야 생산력의 ‘표현’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술을 ‘매개’로 몸을 숨긴 채, 보이지 않는 손을 살랑거리는 존재는 무엇일까. 예술에 관련해, 집합으로 생산하고, 다량으로 존재하고, 한꺼번에 분배되고, 언제나 ‘새것’의 향기를 발산하는 체계를 만든 존재는 무엇일까. 환한 대낮에 세상이 어둡다며 등불을 밝히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광명시 미디어 놀이터> 2005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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