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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25일
![]() 컴퓨터 내부를 열어보면, 복잡하게 얽혀있는 부품과 전선이 발견된다. 어지럽게 난무하는 전선의 밀림은, 강물이 바다로 이어지듯, 한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곳은 ‘메인보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메인보드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 있으니, ‘마더보드’mother board다. 왜 그랬을까, 하고 많은 이름 가운데, ‘어머니’를 붙였을까. 그렇게 은유를 쓰는 까닭을 짐작치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어떤 존재인가. 만물의 근원을 상징하는 은유다. 은유란 공통점에 기초해 용어의 의미를 전용하는 것, 부품과 전선이 집적되고 산출되는 곳이니, 충분히 붙일만 하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할수록 몹시 기괴한 느낌이 솟구친다. 무엇인가 입에 걸리는 것만 같다. 본래 ‘어머니’는 자연이 독점했던 은유기 때문이다. 이때의 자연이란, 만물의 존재가 새롭게 시작된 곳이자, 상처를 받아도 기꺼이 회귀해 치유하는 곳이다. 일상어에서 어머니 자연이란 익숙한 표현이나, 신화에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생각해 보라. 편안한 초록에 따뜻한 냄새가 저절로 떠오른다. 한 마디로 살아 숨쉬는 것이다. 그러니 이상한 것이다. 아무리 공통점이 있다곤 해도, 이 같은 색조에 차갑게 반짝이는 금속은, 입력과 출력을 죽어라 반복하는 기계는, ‘어머니’와 암만해도 어울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품에 안겨 숨쉬기는커녕, 매캐한 냄새에 숨이 막히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이장원의 작업을 찬찬히 살펴보면, 조금씩 고개를 절래 흔들다가, 곧이어 부인하기 어렵다고 깨닫게 된다. 자연이 독점했던 바탕을, 오늘날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인공이 자연을 찬탈해, ‘자연스레’ 어머니가 된 것은 아니냐고. 2. 언뜻 보기에, 이장원의 작업들은 별달라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전자와 기계로 제작됐고,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대화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균일한 논리에 동질적 세계를 구축해 놓은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분별해 보면, 두 가지 계열로 구별되는 양상이 발견된다. 명명의 측면에서 이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갈리고, 내용의 측면에서 생명의 형상을 빌리는 작업과 자연의 근원을 응시하는 작업으로 나뉜다. 이 두 계열은, 얼마간 겹치긴 하지만, 첫 번째 개인전 <Encoding, Decoding>(2004)과 두 번째 개인전 <Protocol>(2005)에 저마다 둥지를 틀고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 탓에, 두 계열을 한곳에 모아놓으면, 서로 다른 집을 동시에 짓는 것만 같다. 그렇게 보니까, 두 계열이 구별된다고 생각하기 무색할 정도다. 오히려 분열되어 있다고 해야 정확할까. 하나씩 따져보자. 먼저, 첫 번째 계열부터, 명명은 인간의 행위요 문화의 질서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대상은 인간의 세계로 편입되고, 인간은 역사의 시대로 돌입한다. 일찍이 정령의 세계에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것, ‘의식’없이 즉자적으로 교감하며 어울려 지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이가 노는 세계다. (무제연작은 모더니즘이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언어를 물리칠 생각에 제목을 붙이기 않았기 때문에, 이장원의 경우와 다르다) 흥미롭게도, 그 세계의 주민은 생명이다. 어떤 것은 식물 같고, 어떤 것은 동물 같다. 그런데 전자기계다. 일종의 인공생명인 것이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기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동인형의 몽상이야, 역사가 개막한 이래로 꾸준히 존재했기에, 새삼스럽게 볼만한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입에서 걸린다. 새삼스럽지 않은 것이 남아있는 것만 같다. 이장원은 미래로 가지 않는다. 대신에 과거로, 즉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는 인공생명을 만들지만, 이 존재는 미래에 있지 않다. 꾸준히 존재한 몽상과 방향이 다른 셈이다. 이 벡터는 두 번째 계열과 합쳐서 생각하면, 더욱더 분명해진다. 두 번째 계열은 당당히 이름이 붙어있다. Suntracer, 옮겨보면 태양추적기, 해바라기로 옮겨도 될 것 같다. 복잡해 보이는 설계도를 뒤로하면, 해를 쫓는 영상만 단순히 남는다. 저기서 찍은 것을 여기서 올린다. 그리고 보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이름이란 형식이다. 형식은 ‘의식’해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작업에서 이장원은 ‘또렷이’ 자연의 근원을 응시한다. 해의 움직임을 말없이 차분히 쳐다본다. 전자와 기계로 구성하여 매끈한 맵시를 자랑하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고가며 영상을 쏘아대지만, 결국 돌아가는 곳은 자연인 셈이다. 벡터는 분명해졌다. 이장원은 무의식적으로 자연을 빚으며, 의식적으로 자연을 보는 셈이다. 이런 그의 작업을, 뉴미디어로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장원은 공학자가 아니다. 장인이자 몽상가다. 그것도 과거의 자연에 잡혀있다. 뉴미디어로 작업하지만, 질료로 사용할 뿐이다. 결코 인공의 논리를 형식에 새겨넣지 않는다. 3. 생각해보니, 전자기판은 자연과 동색인 초록빛이다. 초록기판에 은빛혈관이 일렁인다. 물론, 우연의 일치다. 하지만, 우연을 넘어선 필연의 세계가 구축돼 있다. 전자매체는 일상을 두텁게 둘러싸고, 아이는 거기서 자연스레 성장한다. 자유롭게 유틸을 사용하며, 모든 관계를 모든 생활을 영위한다. 그곳은 자체로 완결된 세계다. 현실과 격리돼도 충분히 살아간다. “실제로 언제 어디서든 대기하고 있다가 어떤 질문에도 두드리면 반응하듯이 대답해 주는 매체는, 잃어버린 반쪽인 어머니의 이상적인 대리물이며, 그와 한쌍을 이룬 아이들은 전자자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폐쇄된 영역 속에 틀어박힐 수 있는 것이다.” 아사다 아키라는 이를 두고 전자모체징후군electronic mother syndrome이라 부른다. 전자모체의 흔적은 손쉽게 목격된다. 예를 들어, SF에서 그려지는 미래사회의 중앙제어장치는 언제나 마더컴퓨터다. PC의 마더보드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인 셈이다. 행복한 미래만 있으면 좋으련만, 일찍이 스탠리 큐브릭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우주선의 인공지능을 할hal이라며, 정확히 헬hell로 묘사하지 않았던가. 이 같은 징후는 강도가 세지면 세졌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장원은 의식하든 않든 간에 반대로 돌아간다. 전자세계를 자연으로 삼지만, 지적한 대로 테크노키드와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어린애처럼 물러서서 교감하며 놀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퇴행은 과거로의 자연적 추락이 아니다. 퇴행은 현재 밖으로의 의도적인 도피다. 회귀라기보다 차라리 의지인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현실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음으로써만이 우리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병리적 행동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거는 잃어버린 조국처럼 우리가 되돌아오는 최초의 땅이 아니라 인위적이며 상상적인 대체의 과거인 것이다.”(푸코) 미래는 닫힌다 쳐도, 들어보니 과거마저 닫혔던 거라니. 결국 그랬던 거였다. <대안공간네트워크> Door to Door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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