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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5월 25일
![]() 사실, 예전부터 자기를 직접 재현한 형식은 많았다. 자서전도 있었고 자화상도 있었다. 하지만, 셔먼의 자기사진 몸소찍기는 사정이 제법 많이 다르다. 자서전이 두 권인 경우는 드물다. 자화상은 여럿일 수 있지만, 그래도 저마다 일회적이다. 때문에, 많게 그리든 적게 그리든, 하나임을 역설할 수 있었다. 이름하야 단수적 현존이다. 하지만, 사진으로 넘어오면, 사태가 판이해진다. 존재 자체가 복수이기 때문에, 현존 운운은 씨알도 안 먹힌다. 이름하야 복수적 현존이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크게 만들어 하나 걸면 폼 날까 싶어, 커져라 세져라, 이런 사진도 있다. 졸렬한 시대착오지만, 얍삽 빠르게 적응한 결과기도 하다) 물론, 이제까지는 다 아는 닳고 닳은 이야기, 신디 셔먼의 흥미로운 가면놀이는 시작조차 안했다. 앞서 지적한 복수성은 예술‘형식’에 국한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전통적 예술에 재앙이었겠지만, 셔먼은 그것도 모자라 한 발짝 더 나간다. ‘질료’의 복수성, 그런데 자기 자신이 질료다. 이 결과, 창조주 예술가의 초상은, 완벽히 확인 사살된다. 왜냐하면, 첫째 일찍이 객체를 멀찍이 두고서 포획했던 주체가, 결국 자기 목을 조르는 꼴이며, 둘째 더군다나 항상 남의 가면을 쓰고서야 출현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남의 탈을 쓰고 자기 목을 조르는 웃기는 형상이 그려진다. 기묘한 조합이지만, 퇴행된(전도된) 주객동일성에 주체의 소멸이 덧붙여지는 것 같다. 그래도 셔먼은 ‘예술’을 빌어서 작업을 했었다. 예술장례를 예술로 만들었다고 할까. 그랬기 때문에, 옛날과 다른 방식으로, 즉 예술의 ‘외부’에서 거리를 확보해냈다. 하지만, 21세기, 오늘날, 매일같이 대량으로 대중들이 벌이는 장례식은 그것마저 희미하게 만든다. 예전 같지 않은 현전이 과잉되는 것이다. 전선은 손댈 수 없는 내부로 후퇴했다. 어쩌면 영영 사라져 버린 지도 모른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가면의 기능이다. 진실로 가면이 은폐하는 것은, 가면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면은, 가면을 가린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물론 아기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긴 하지만, 현재 상황은 없었던 아기라도 있었던 아기로 만들 정도로…. <중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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