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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7월 07일
![]() ‘공간’은 생각할수록 기묘한 말이다. ‘빌 공’자에 ‘사이 간’자인데, 풀어보면 말뜻을 짐작하기 어렵다. 비어있음에 사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난감해지는 것은 ‘지칭’하는 것이 없는 탓이 크다. 모름지기 언어는 지칭이다. 지칭하는 것이 없는데 단어는 존재하는 역설. 생각해보면, 지칭 없는 말들은 수두룩하다. 일찍이 플라톤은 ‘없음’nothing의 문제를 지적하며, 없는 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엉뚱한 철학적 골치를 양산한다고 불평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특히 유럽의 언어는 ‘있음’과 ‘임’이 결합돼 있는 탓에, 더더욱 ‘존재’Sein의 문제가 엉클어진다. ‘없는 것’도 없으려면, 우선 ‘없는 것’이 있어야 하는 역설이자 과잉 때문이다. 이 점은 그림도 전혀 다를 게 없다. 어쩌면 말보다 상황이 심각할지 모른다. 언어는 애초부터 재현의 질서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이것이 소쉬르의 지대한 기여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가 자의적 관계를 맺는다고 지적했지만, 암암리에 언어와 대상의 관계 또한 자의적이라고 전제하고 있으며, 아니라도 충분히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하든 않든 부정하든 않든, 그림은 언어와 달리 재현의 질서에 벗어날 수 없다. 아도르노가 지적했듯, 모더니즘이 사회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사회와 관계했다는 부조리와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과 같은 지칭 없는 대상을 ‘재현’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언어보다 여러 모로 복잡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러한 문제는 이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과잉이라는 것은 어쩌면 인류의 문명이 암암리에 은폐했던 옛기억이자 본연의 성질인지도 모른다. 2. 노충현의 <자리>는 있긴 있지만 사실 없는 것을 재현한다.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역설이 아니냐고 반문해선 곤란하다. 정확히 말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범주가 틀리기 때문이다. 즉 전자가 형이상학의 범주에 있다면, 후자는 사회학의 범주에 놓여있다. 하지만 범주오류의 문제와 상관없이, 과잉과 역설의 문제는 여전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노충현의 <자리>에서 눈에 띠는 점은 사진의 시각이라는 점이다. 이것만 생각하면, 솔직히 새로울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포토리얼리즘의 역사도 이제는 제법 오래 됐으며, 최근에 사진으로 작업한 작품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충현의 사진은 최근의 극사실주의적 작품과 성격이 매우 다르다. 알다시피 포토리얼리즘회화는 리얼리즘이 아니다. 현실을 재현하는 대신, 사진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진이 잊은 채 감춰두는 사진의 시각성을 드러낼 뿐, 현실과 전혀 관계없이 전개된다. (이 때문에 곧잘 초현실주의와 이렇게 저렇게 엮이곤 하는데, ‘초’-현실주의긴 하겠지만, ‘초현실주의’는 아니다. 초현실주의가 현실적 세부와 자의적 결합이라면, 포토리얼리즘은 중심 없는 세부의 전면화다) 노충현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솔직하다. 회화의 늙음, 주체의 소외, 세상의 타락 앞에서, 그는 사진의 시각성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이제는 이런 식으로 세상과 사람을 응시하는 구나, 그것도 얼마간 향수를 담아서 우울한 시선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화려하게 치장하며 뽐내지 않은 체, 담담히 인정하고 수용한다. 3.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면모가 작품의 형식과 내용 모두 적용되어 있는 탓에, 절묘하게 공명하는 것이다. 그가 응시하는 대상은 공간, 그것도 속이 퀭한 빈터들이다. (구체적 대상이 등장할 때도 있으나, 대상이 긍정적・정립적으로 화면을 채운다고 볼 수 없다. 반대로 빈곳을 더욱 비어 있게 만든다고 봐야겠다) 그것은 또한 도시의 흔적을 부정적으로 상징하는 것들이다. 이때 ‘부정’이란 딱지를 붙인 이유는 사진의 음화negative 같은 성격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도시란 자연(현실)을 밀어내고 그 위에 건립된 거대한 인공현실이다. 누누이 지적되고 비판받는 서양문명의 ‘건축의지’의 표현, 다른 말로 짓고자 하는 욕망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위에 무엇인가 이질적인 것이 얹혀지기 때문에 조화가 뒤틀리고 어긋나기 마련이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인가 이질적인 새로운 것’이 앞서 지적한 긍정적・정립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니 노충현의 작업이 새삼 신기할 수밖에 없다. 그는 묻히기 쉬운 도시의 텅빈 뒤안길을 차분히 응시한다. 더군다나, 사진의 시각에다, 회화의 손길을 덧대었다. 사실 사진은 대도시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물화된 현실에 장막 같은 군중의 등장은 생명 없는 기계의 눈과 정확히 일치한다. 일찍이 바쟁은 사진을 리얼리즘의 완성으로 간주했지만, 기존의 리얼리즘전통을 잇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지점에서 눈과 몸을 구별한 메를로-퐁티의 분석이, 몸으로 그렸던 세잔의 회화가 빛나는 지점이다. 사진이 대상을 순식간에 시각적으로 착취하는 사이라면, 회화는 대상과 호흡하는 사이라는 것이다. 결국 노충현은 생명 없는 시선 위에 호흡하는 손길을 얹은 셈이다. 이처럼 채워넣고 지워내는 행위의 반복은 언뜻 보기에 상당히 무용한 몸짓이다. 이 과정에서 대상이 모호해지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적막한 도시풍경인가, 도시풍경 사진인가, 사진을 빌미로 삼은 공허한 내면인가. 하지만 무엇이든 어떠랴, 그렇게 쌓다가 허물고 하는 무용한 몸짓을 일삼는 것이 인간이 걸어온 길일지도 모를 일이니. <벨벳갤러리>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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