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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8일
![]() 1. 그렇다. 조금 외로워졌을 뿐이다. 그래서 옛날에 적었던 일기도 들추고 찍었던 앨범도 보면서, 과거를 아련히 떠올리는 것이다. 좋았던 옛 기억을, 아니면 그랬다고 믿거나 그랬을지 모를 추억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창문 너머를 응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깟 창문이 과거와 현재를 잇지는 못한다. 잇는다면 환상밖에 없을 뿐, 결국 일기와 앨범이 주는 것은 달콤한 향수요, 아픔마저 감미로운 추억인 것이다. 2. 90년대 한국은 오랫동안 갈구했던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80년대 흘렸던 피와 땀의 결과였다. 하지만 결실은 정치보다 문화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80년대는 역사의 부채가 어깨를 눌렀던 시기였다. 어느 누구도 현실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대답해야 했으며, 참여하든 도망치든 행동해야 했다. 개인은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개인의 목소리가 울리지 않는 곳에서 문화는 생동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80년대는 정치적으로 해방기였는지 몰라도, (성과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없겠지만) 문화적으로 암흑기였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자 상황은 달라졌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소비사회로 진입하며, 전과 판이한 문화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대학생의 옆구리가 사회과학서적에서 하루키의 소설로 바뀌었던 것은. 이념학습을 하며 거리를 나갔던 그들은 팝송을 흥얼이며 어스름한 불빛의 카페로 발빠르게 퇴각했다. 전장에서 이탈한 탈영병은 지치고 배고플 수밖에 없다. 역사와 현실은 무거웠으리라. 그러니 벗어버리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채웠던 것이 사라지자, 공허밖에 남아있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개인 혼자서 그 짐을 지게 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때였다, 한국사회에 온전한 ‘개인’이 등장한 것은. ![]() 하루키는 그 허기를 감미롭게 채워줬다. 어떻게 고통마저 달콤할 수 있을까. 어쩌면 한국사회는 그렇게 갈구했던 민주주의를 공허와 함께 (어쩌면 가공의 역사적 향수와 함께) 흡입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유념해야 한다. 이것은 살아 숨 쉬는 ‘현재’를 담보로 잡힌 역사적 거래기도 하였다는 것을 깊게 새겨야 한다. 하루키는 그런 식의 역사적 부채도 없고 현실적 압박도 없는 세계를 선물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감성의 퇴행인지 내면의 응축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온전한 개인이 등장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과정은 필연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키가 소비된 지 10년이 훌쩍 지나간 지금, 김한나의 그림을 보면 적어도 내면의 응축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예 내면의 깊이가 조금씩 얇아진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런 식으로 그녀 한명에게 묻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을 현재 세대의 감성이 드러난 징후로 본다면, 그리 간단하게 회피할 만한 상황도 아닐 것이다. 4. 아이가 인형과 동물에게 집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존재의 모태인 어머니와 맺었던 환상적인 (기만적인) 세계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절은 필연, 아이는 어머니를 대체할 대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그대로 수행한다. 대화가 필요하면 친구가 되고, 먹을 것이 필요하면 엄마가 되고, 방어막이 필요하면 보호자가 된다. 아이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이는 그런 식으로 어머니와 함께 구축했던 완전무결한 세계를 하릴없이 반복한다. 김한나에게 토끼는 바로 그런 존재다. 그것이 인형인지 동물인지 무엇 때문에 토끼인지, 판가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물론 그녀만의 소소하게 흥미로운 개인사가 있겠지만, 그녀만의 독특한 서사가 그림에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꿈처럼 동화처럼 예쁘고 따뜻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 세계는 외부가 없는 세계기도 하다. 이 점은 그녀가 구축한 평면에 솔직히 표현되어 있다. 그녀와 토끼 외에는 아무런 존재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배경에 특별한 실마리가 드러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두 존재만을 위한 곳일 뿐이다. 즉 바깥이 깨끗이 청소된 세계. 헤겔의 용어로 푼다면, 김하나의 세계는 ‘즉자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면이 없는 세계’기도 하다. 알다시피, 내부는 외부와 한짝이다. 내부는 외부를 ‘의식’하는 순간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바깥에 열린 창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5. 현재 젊은 세대는 시대와 현실의 무게를 완벽히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얼마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루키의 고통마저 감미로웠던 감성은 조만간 촌스러워질지도 모르겠다. 허나, 김한나는 그것마저 무겁다고 무섭다고 속삭인다. 토끼는 그런 그녀를 보호하며 그런 그녀는 토끼 뒤에서 몸을 숨긴다. 하지만 역사와 현실이 지워진 세계만큼 두려운 세계는 없다는 것을, 솔직히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불어 그런 세계를 가장한 ‘자본의 논리로 무장한 세계’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안 보고 있는지 못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직시해야 한다. 2007년 아라리오 전속작가로 뽑히고 대안공간 루프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이제 탄탄대로의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녀가 얼마 동안 못 본체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안공간 루프> 2006. 10. 13. -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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