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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01일
![]() 1. 이원론 dualism은 철학에서 오래된 학설이다. 처음에 그것은 형이상학에서 출현했다. 일찍이 플라톤은 진상계와 현상계를 나누었고, 후자를 전자의 복사로 간주했다. 그는 형이상학을 본격으로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이원론의 기본뼈대를 완성시켰다. 한쪽은 진짜고 한쪽은 가짜며, 후자는 전자의 질서에 따라 구축된다. 이른바 형이상학적 줄 세우기(줄에 한 번서보지도 못하고 내쳐진 것이,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시뮬라르크’다. 존재론적 ‘왕따’라고 할까). 이때부터 철학사는 유령처럼 배회하는 플라톤과 어떻게 겨룰 수 있을지 문제였다. 오죽 했으면, 지금까지 철학사는 플라톤의 주석이라고 화이트헤드가 일갈했을 정도였을까.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원론은 역사적 시기와 철학적 분야를 가리지 않고 출몰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대표적이다. 실체를 두 가지로 갈라놓고 고심하다가, 송과선이란 희대의 철학적 농담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사실, 농담이라고 했지만, 논증 같은 진담으로 돌파할 구석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심신이원론이 심리철학에서 유효한학설로 살아남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랬던 전력 때문에, 이원론은 철학사 전체를 통틀어 악명이 자자했다. 어떻게 하면딜레마의 양 뿔을 피해갈 수 있을까 쟁쟁한 철학자들이 고민했지만, 양 뿔을 부러트릴 창은 여간해선 제작되지 못했다. 그런데 제4회 서울 국제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가 바로 그 악명을 이어 받았다고 한다. 이름 하여 ‘두 개의 현실’이다. ![]() ‘DualRealities’. 솔직히 말해서, ‘진단’의 의미가 없지는 않다고 본다. 현재 가상현실은 완연히 일상으로 자리 잡았고, 그에 따라 (충돌이든 확장이든 경쟁이든) 전에 없던 현상과 문제가 하루가 다르게 출현하고 있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상황을 가늠할 필요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별달리 건질 게 없다. 특히 두 가지 측면이 문제(부재)가두드러진다. 첫째 매체예술 자체가 함축하는 존재론적 의미. 이번 비엔날레가 ‘현실’을 문제 삼은 것처럼, 매체예술의 하위 장르인 가상현실은 새롭게 형성된 현실을 공공연히 긍정하고 전제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일치감치 쟁점으로 부각된 지 오래다. 윌리엄 깁슨은 1984년 ꡔ뉴로맨서ꡕ에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오가는 모험을 그려내며, 현재 벌어질 만한 대부분의 쟁점을 쏟아냈다. 현재는 그때로부터 20년이 훌쩍 뛰어 넘은 2006년이다. 먼저 소개됐다고 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나, 다뤄졌던 주제를 반복한 것이라면, 역사적 두께에 걸맞는 최소한의 ‘변주’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성찰의 깊이가 뚜렷했으면 상쇄할 만도 했겠지만. 제대로 된 전위가 아니라면 후위라도 제대로 할 일이다. 때문에 그 주제는 과잉이자 빈곤이다. 둘째, 현재 한국에서 급속도로 재편되는 매체문화의 지형. 알다시피, 한국은 디지털・모바일・인터넷 등등 이른바 새로운 문명의 베타테스터로 자리 잡았다. 국가자체가 일종의 얼리어답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의 파도가 언제나 폭풍처럼 다가온다. ‘집단지성’이 ‘집단실성’으로 퇴화하는 상황, PK가 아예 현피(현실 PK)로 진화하는 지경, 얼리어답터를 가뿐히 뛰어넘어 디지털 폐인을 양산하는 문화 등등, 다른 지역의 ‘현상’이 이곳에는 ‘일상’인 것이다. 전시서문을 보면, 기획자는 일종의 기회로 판단한 것처럼 보인다. 매체의 하드웨어와 매체를 읽고 쓰는 능력 media literacy가 세계 어느 곳보다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것은 양날의 칼이다. 잘 못 썼다가는 자기 목을 조르기 쉽다. 사실 비슷한 상황은‘호모 루덴스’를 주제로 삼았던 3회 때, 이미 얼마간 드러났다. ‘놀이’로 주제를 삼고 ‘게임’의 문제를 끌어 들인 것 자체를 나무랄 것은 아니지만, 게임의 문법을 겨우 차용해 가며 힘겹게 쫓아가는 모습은 보기에도 역력했다. 이번에는 달랐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묻고 싶다. ‘두 개의 현실’을 구획하는 가지들이 과연 ‘지금・이곳’에서 유효한 것인지, <두 개의 현실>을 채워 넣은 작업들이 가지들에 알맞게 꽃을 피우고 있는지. 작업 몇 개가 좋다고 덮을 만한 형세가 아닌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후위 노릇도 쉬운 것이 아니다. 두 눈 똑바로 뜨지 않으면, 전위가 갔던 길조차 쫓아가기 어렵다. 혹시나, 그 옛날 누렸던 전위의 욕망을, 아니 미망을 여전히 품고 있다면, 어서 빨리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 3. "진리는 진부한 것이다.”(가라타니 고진) 중요한 것은 결국 성찰이다. 문화적 현상을 뒤늦게 그대로 스캔하는 진단이 아니라, 속내에 감춰진 삶의 무늬를 독해하는 분석이필요하다. 인문학에서 빌려올 것도 따끈따끈한 최신 개념이 아니라, 성찰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다. 적어도 다음과 같이 개념들의 샐러드로 탈주선을 확보하는 모양새는 보기 좋은 게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가상 현실상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현실세계를 준거하지 않는 공간의 운동과 시간의 흐름을 구성하며, 우리는 오늘 예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무한한 깊이감을 지니는 시간과 공간의 ‘주름’을 접고 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공간의 한계와 시간의 한계가 사라져 버리는 지각의 체험을 매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오늘의 역사가 일직선상의 시간의 궤적을 이탈하며 시간과 공간의 역회전을 허용하는 비선형적 구조로서의 비역사성의 시간으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이원일, ‘두 개의 지평선, 그 매혹적 경계 위에서’) 이제 사람들은 케이블, 전화, 국제적인 인공위성을 통해서 거의 실시간으로 유대를 맺을 수 있으며, 그림처럼 생생한 텔레비전 영상을 통해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고, 컴퓨터화 된 정보가 담긴 거대한 데이터뱅크를 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광범위하게 확장된 세계를 살아간다.(다니엘 벨) 마노비치가 말하는 ‘리믹싱 re-mixing’의 영역이 글쓰기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들뢰즈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의 개념들을 깨끗이 탈색하고 나면, 과연 다니엘 벨이 대략 30년 전에 테크노피아를 꿈꾸며 했던 진술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고장난 녹음기도 아니고, 이제는 반복해서 듣기도 지겹다. 꿈속에서 송과선 같은 농담은 이제 그만 하고, 현실에서 실제 벌어지는 삶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지. “거친 대지로 돌아가자.”(비트겐슈타인) <abcpaper>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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