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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25일
![]() 중앙에 가짜 가죽 소파 하나, 그 뒤엔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는 괘종시계가 걸려 있고, 세잔風 정물화 한 점, TV 세트, 창을 향한 辛運木 한 그루, 그리고 폼으로 갖다놓고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 ꡔ자본론ꡕ(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가로로 쓰러져 있는 서투른 書架와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수족관: 그렇지만 이 무대에서 번역될 만한 비극은 없다.(황지우, 「살찐 소파에 대한 日記」) 1. 광대가 무대를 벗어나 평면에 본격으로 출현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100년 안팎 정도. 그저 광대로만 출연했으면 별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광대가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이야, 적게나마 옛날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경우에 지평은 그전과 상당히 달라졌다. 기라성 같은 모더니즘의 선봉장들이 자신을 어릿광대로 투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남들이 그들을 광대로 간주했다면, 지금에는 스스로 자신을 광대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대한 변화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낮게 낮추고 작게 줄이는 현상은 무엇보다 현실로부터 멀어진 소외의식과 관련이 깊다. 현실을 어찌해 볼 수 없다는 것, 솔직히 현실은 예술에 관심이 없다는 것, 요즘에는 예술에서 감동은커녕 위안조차 구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그것은 현실에 완전히 패배했음을 자인한 결과기도 하다. 신고전주의에서 현실과 혁명적인 화해를, 비판적 리얼리즘에서 현실과 불꽃같은 일치를 경험한 이후, 예술은 현실과 두 번 다시 행복하게 만나지 못했다. 절정에 올랐다 바닥으로 추락한 소외의식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니 자신을 있으나 마나한 광대로 보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 광대야말로 잉여인간의 전형이 아니던가. 소외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광대만이 아니었다. “마네킹―이것은 한 시대 전체의 감수성을 나타내는 진정한 표징이자 초현실주의의 삶의 변형의 궁극적 토템으로, 이 속에서는 인간의 육체자체가 하나의 생산물로서” 나타난다.(제임슨) 광대가 육체와 정신의 크기를 줄인다면, 마네킹은 존재의 내부를 말끔히 제거한다.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주체의 몰락을 드러내는 상징들이다. 이후 그것들은 두고두고 여러 판본으로 출몰하게 된다. 생각해볼수록 아이러니다. 모더니즘이야말로 무엇에 ‘대한’ 존재였던 (평면) 작품을 무엇과 ‘무관한’ (입체) 개체로 끌어올렸지만, 정작 모더니스트야말로 현실에서 소외되어 작은 광대로 텅빈 마네킹으로 내팽개쳐졌기 때문이다. 마치 생명을 스스로 빼앗긴 것처럼 보인다. 박용식은 그곳에 있다. 거기서 뿌리를 박고서, 생명을 키운다. 광대 같고 마네킹처럼 작고 작아진 존재에 집도 주고 옷도 주고 자신만의 혹은 그들만의 공화국을 건설한다.
2. ![]()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무엇 때문에 자신을 내보냈다가 불러들였을까. 중요한 것은 실종이 능동적이란 점이다. 자신의 모습을 즉자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자신의 경험을 되새겼다 내보내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형식은 좀더 완숙해진다. 여기서 분수령이 되는 작업이 <개와 소주병>(2002) 연작이다. 이 작업은 두 계열을 완성된 형태로 제시하며, 자신과 작업과 세계의 관계를 정립한다. <YS Entertainment Company>는 이 연작의 최종판으로 봐도 무방하리라. 앞서, 두 계열의 관계를 현실과 재현의 관계라고 했지만, 계열이 비틀린 까닭에 대칭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인용’에 가깝다. 직접 말을 하는 것보다, 발화된 말을 인용하며 간접으로 자신을 끼워 보내는 것이다. 당연히 대가가 따르기 마련, 인용만큼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기 좋은 방법은 없기에, 약동하는 경험은 정연한 형식에 굴복할 수밖에. 때문에 그의 작업이 세련된 우의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울’의 골똘한 시선 밑에서 대상이 우의적인 것으로 바뀌고 거기서 생명이 빠져나갈 때도, 대상자체는 여전히 남는다. 죽었으되 영원히 보존될 상태로…우의가는 대상에 자기의 의미를 불어넣으며, 스스로 내려가 그 속에 거주한다. 그런데 이는 심리학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벤야민) 하기야 어쩔 수 없는 것이 그것뿐이겠는가. 비극은커녕 소소한 드라마조차 제대로 만들어지기 힘든 현실에서 조금씩 죽어가는 작은 것들이.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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