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기울어진 방주>의 장래를 결정하는 청문회 전문 번역


 

의장 테드 와이스: 12피트 높이와 120피트 길이에 73톤을 넘는 용접강철로 된 휘어진 강철이 당신 집 앞의 길거리를 양 갈래로 가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그곳에 살며 일하는 사람이 <기울어진 방주>에 느꼈던 반응을 상상할 있겠지요.

이 조각의 자연스런 산화코팅은 충격효과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이 조각에 녹슨 금속벽의 모습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죠. <기울어진 방주>를 처음 본 많은 사람은 건축자재의 폐기물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동시키기에 너무 크고 성가신 유물이라고 할까.

이 예술가는 <기울어진 방주>로 “광장의 장식기능을 변경하고 탈구”시키려 의도했다고 합니다. 그게 의향이었다면, 사람들은 이 조각의 거칠고 혼란스런 효과를 보고서 이 예술가가 훌륭하게 성공했다고 결론내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근처에 사는 주민에게, 일하는 사람에게 어땠을까요? 이 조각은 광장을 둘로 나누며 건물 현관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 광장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건물 진입로는 꼴사납고 우스꽝스러우며, 이 건물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동선이 망가졌습니다.

이제 <기울어진 방주>의 새로운 위치를 모색할 때입니다.

세라씨는 그의 작품이 장소 특정적이므로 다른 장소에 두는 일은 그것을 파괴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이 작품이 광장에 대한 독점권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회화가 캔버스에 존재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세라씨의 입장과 충돌하는 여러 타당한 주장이 제기됐으며, 그런 입장에 따라 논의의 추가 기울어졌다는 점을 지적해야겠군요.

그곳에서 살며 일하는 수천명의 사람들에게는 연방광장의 원래 의도였던 편히 쉴만한 작은 휴식처를 재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세라씨, 나는 당신 작품이 파괴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좀더 적절한 장소에서 이 작품을 보고 싶군요.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리차드 세라: 내 이름은 리처드 세라며 미국 조각가입니다.

나는 휴대용 물건을 만들지 않습니다. 나는 이동할 수 있는 작품도 만들지 않으며 장소를 조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제시된 장소의 환경요소를 다루어내는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나의 장소 특정적 작품의 규모, 크기, 위치는 장소의 지형이 결정하죠. 그 장소가 도시든 풍경이든 아니면 건물의 담이든 간에 말입니다. 나의 작품은 장소구조의 일부이자 그것의 재료가 되고 있으며, 개념적으로도 지각적으로도 장소의 조직구성을 곧잘 재구성합니다.

나의 조각들은 멈춰서 응시하는 관찰자를 위한 대상이 아닙니다. 과거 조각의 목적은 조각을 받침대에 올려두면서 조각과 관찰자를 분리시켰습니다. 나는 관찰자와 조각이 상호작용하는 행동공간을 창조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죠.

한 사람의 인격인 정체성은 그 사람의 공간・장소 경험과 밀접히 연결돼 있습니다. 잘 알려진 공간이 장소 특정적 조각을 포괄하는 바람에 변하게 될 때, 사람들은 이 달라진 공간과 전과 다르게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돼지요. 이것이야말로 조각만이 발생시킬 수 있는 조건입니다. 이런 공간경험은 어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겠죠. 

정부가 광장을 위한 조각을 만들라고 내게 제안했을 때, 영구적이고 장소 특정적 조각을 요구했던 셈이죠. 장소 특정적 조각은 특정 장소의 특수한 조건과 맺는 관계에서, 또한 그런 조건과 맺는 관계에서만 이해되고 창조됩니다. 

따라서 <기울어진 방주>를 옮기는 것은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 되겠죠….

처음부터 대중은 이 작품이 설치되길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사실 예술가를 선택한 일이나 광장에 조각을 영구히 설치하자는 결정이나 공공기구인 미연방총무처(GSA)가 한 일이었습니다. 국가규범에 따라 결정됐고, 조심스럽게 절차를 밟았으며, 또한 심사위원회 체계는 공명성을 보장했고 영구불변한 가치를 담은 예술을 정선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대중 자신이 바로 그들을 위해서 이 조각을 선택한 셈이지요.

정부기관이 공약을 했고 계약을 했죠. 이러한 결정이 외부압력 때문에 번복된다면, 예술 관련 정부정책의 도덕성은 손상될 것이며, 도덕적인 예술가는 참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압력에 부딪혀 정부가 예술작품을 파괴할 수 있다면, 예술의 다양성을 육성하는 정부역량은 물론이요 창조적 표현의 자유를 보호할 권력마저 위험에 빠지게 될 테죠.


판사 도미니크 디카를로: 나는 내가 미연방무역법원United States Court of International Trade에 임명될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나는 <기울어진 방주>를 처음 보게 됐습니다. 나는 중앙광장으로 차를 몰고 갈 때 그것을 봤습니다. 그게 도대체 뭐였지? 잘 보니까 그것은 12피트 높이에 120피트의 녹슨 강철 덩어리였습니다. 로마, 이슬라마바드, 랭군, 방콕 대사관을 방문한 후 돌아오면서 나는 이 녹슨 강철물체가 테러 대비 장벽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대비해 연방정부건물 보호대책의 일부라고 말이죠. 그런데 왜 그렇게 장벽이 커야 하지? 이거 과민반응 아닐까? 테러 활동이 훨씬 극렬한 도시라면 눈에 띄는 간선도로 칸막이highway divider나 콘크리트 기둥이 그 일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법원에 임명된 뒤에 나는 그것이 예술이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아름다웠던가? 아름다움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이 예술가가 정치적 진술을 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어쩌면 그것은 버려지고 녹슬어 버린 강철장막이었을지도, 아니면 작가가 그의 무역정책 관점을 표현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죠. 이것이 무역법원입니다, 하고서 말이죠. 그런데 그의 강철장벽은 보호무역주의 관점을 나타냈던가요?

우리는 왜 강철장벽이 이 광장에 있어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책임자들이 말해줬으니까요. 공간을 재정의하고 관찰자의 광장 경험을 변화시킬 생각으로, 그곳의 장식기능을 변화시키고 탈구시킨다는 것이죠.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의도는 광장의 고유한 예술적 개념을, 광장 설계자의 개념을 파괴하자는 것이죠.

조각가의 의도가 또 다른 예술창조를 파괴하는 것이었기에, 작품의 완전성을 보존한다는 공정한 도덕적 권리에 근거해 강철 벽을 치우는 것에 반대한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피터 히쉬: 나는 이민법호사협회Association of Immigration Attorneys 연구이사이자 법률고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26번가 연방정부 광장을 지나다니죠. 그곳에 이민국Immigration Service이 있으니까요.

내 동료들은 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하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기울어진 방주>에 전적으로 반대한다고. 내 생각을 말하자면, <기울어진 방주>를 옮길 만한 좋은 장소는 허드슨강에 있다고 봅니다…나는 어떤 이들이 줄무늬 농어의 피난처를 제공할 생각으로 허드슨강에 인공물을 나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기울어진 방주>가 매우 훌륭한 피난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프러드 호프만: 나는 미술사학자며 로스엔젤리스의 수많은 선도적인 문화기구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현대미술 학예원입니다.

앞서 제기된 압력에 굴복해 세라의 작품이 철거된 광장에서 못내 그리워하는 것보다는 <기울어진 방주>를 보존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의 사회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거주하고 의존하고 있는 공간들의 본성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기울어진 방주>와 같은 중요한 예술작품들을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자리만 잡고 앉아서, 뒤 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말이죠. 이 작품의 의도는 즐겁게 하고, 위안하고, 평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울어진 방주>는 계속해서 우리 경험을 활동하고 역동하고 확장하게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점점 진부해지고 냉담해지고 유행만 쫓는 세계에서 마비되지 않았으며, 아무 생각 없는 상태에 빠지지 않았고, 우리 운명에 냉담해지고 점차 자유가 줄어든다는 사실에 무관심해지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시켰죠.


윌리엄 루빈: 나는 근대미술관(MoMA) 회화・조각 부문 책임자입니다.

수많은 근대예술의 창조물과 마찬가지로 <기울어진 방주>는 일반적으로는 용인된 가치를 문제삼고 특별하게는 예술의 본성 및 예술과 대중간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든 도전적인 작품이죠.

대략 백년전 인상주의자와 후기인상주의자(가령 모네, 고갱, 세잔)는 오늘날 보편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예술가지만, 그 당시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조롱을 받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에펠탑 역시 비웃음만 진창 샀죠. 작가와 철학자뿐만 아니라 당시의 선도적 건축가들 역시 에펠탑을 시각적으로 음탕하다며 힐난했습니다.

상기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정말 도전적인 작품은 작품의 예술언어가 광범위한 대중에게 이해 받기 전까지 시간이 필요한 법이죠.

나는 대중이 의결해 세운 공공기념물을 철거한 결정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그런 식으로 논의된다면, 내가 보기에 매우 위험천만한 전례가 될 것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결정은 단지 근처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광범위한 집단의 정서에 영향을 틀림없이 미칠 테죠. 

어떤 조치를 고민할 지라도 압력전술에 응수한 반응이 돼선 분명히 안 되며, 무엇보다 조각가의 예술언어가 친숙해지기 전까지 논의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나는 이 쟁점을 십 년 뒤로 미뤄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조엘 코벨: 나는 작가며 새로운 사회연구학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교수입니다.

이 청문회야말로 <기울어진 방주>의 전복성을 증명하며, 그에 따라 이 작품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기울기와 녹은 어슴푸레하고 냉혹한 강철과 국가기구의 유리 같은 구조가 어느 날 소멸해버릴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무의식적인 저항과 희망의 의미를 창조하고 있는 셈이죠.

이러한 저항은 그 자체로 창조적 행위입니다. 정말이지 이 청문회가 창조적 행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의 참된 잣대야말로 이 사회가 이 같은 저항을 용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청문회는 세라의 작품을 이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저항의 잣대로 받아들여 보존시켜야 할 것입니다.


조셉 리브맨: 나는 26번가 연방광장에 소재한 연방 법무부 산하 국제무역부 민정과International Trade Field Office, Civil Division 담당 변호사입니다.

나는 1969년부터 26번가 연방광장에서 일했습니다. 이 광장이 내 모든 바람을 채워주진 않았지만, 1980년까지 내게 이 광장은 마음을 늘어트린 채 걷고 앉고 묵상하는 푸근한 공간이었습니다. 때때로 햇볕이 광장을 드리우며 활기차던 이곳에 새로운 풍경과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죠.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공기를 내뿜는 분수의 차가운 물보라를 기억하고 있죠. 악단의 공연도 생각나고, 광장에서 어머니들이 유모차를 흔드는 동안 거기서 이웃주민의 아이들이 공연하던 음악소리도 생각납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나 열애중인 젊은이들 같은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서 참고인 조사를 골똘히 생각하며 광장을 자유롭게 걷던 기억도 납니다. 회화・조각 야외전과 민족무용축제 등등, 좌석이 마련된 공연장에서 하면 어떨까 꿈꾸었던 문화공연들도 기억납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추억일 뿐입니다.

작품제작자의 생각이 무엇이고 예술적 성취가 어찌됐든 간에, <기울어진 방주>는 이 광장에 의미 있는 가치를 보태지 못했습니다. 이 예술은 우리가 한층 공허한 삶을 살았다며 유죄판결을 내리고 있죠. 아이들과 악단과 나는 더 이상 광장에 찾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 방주가 광장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이 방주가 어떤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든 광장의 혼란과 우리네 삶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창조물인 방주는 양보해야 합니다. 다른 곳에 옮겨져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황폐한 유괴판결로부터 우리는 구제돼야 합니다….


도널드 주드[조각가]: 맨하탄 연방광장에 설치된 리차드 세라의 작품을 파괴하려는 생각을 분류하려면, 신성모독의 세속적 판본을 회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낡거나 새로울 뿐이죠. 그것이 시각문명입니다. 세라의 작품을 못쓰게 하려는 사람은 야만인입니다….


홀리 솔로몬: 나는 소호에 미술관을 갖고 있으며 현재 57번가로 이사했습니다.

나는 논의를 법률적 사항에 한정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취미를 논의하거나 이 작품의 역사적 중요성을 논의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나는 딱 한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사업입니다. 이 작품을 파괴하는 것은 좋지 못한 사업이죠. 세라씨는 우리 시대에 손꼽히는 조각가입니다. 나는 많은 회화작품을 팔고 있죠. 나는 사람들에게 현대예술을 알려주려고 힘겹게 노력하고 있지만, 최종결론은 현대예술이 재정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며, 여러분은 재정공동체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할겁니다. 여러분은 자산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필 라 바지: 나는 22년 동안 연방정부 고용인이었으며, 대략 11년 동안 이 건물에서 일했죠.

우리 중 몇 명이 이 구조물에 반대한다고 해서 백치나 보수반동주의자로 몰리고 있다고 합니다. 우선 난 정말 이런 현실에 분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군요.

이기적인 예술가와 소위 사이비 지식인들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말했을 때, 그 사람을 공격하곤 합니다. 이런 측면만큼 그들을 잘 드러내는 모습은 없겠죠. 그래서 나는 예술가를 공격할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거기서 본 것은 소련의 침공에 대비해 중국이 설치한 탱크 트랩 같이 생긴 것이죠. 내 생각에 그것은 그 일조차 제대로 못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능 좋은 러시아 탱크는 십중팔구 그것을 못쓰게 만들 테니까요.

나는 진지하게 그것을 <기울어진 방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내게 그것은 구부러진 금속이거나 굽은 금속처럼 보입니다. 어떤 것이라도 예술로 불린다면 예술로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서 누구라도 자동차나 다른 물건에 부딪혀 낡아 망가진 자전거를 들고 가다가, 멈춰 세우고, 그것을 예술이요 부르며, 무엇이라 제목을 붙일 수 있겠죠. 나는 그것이 여기서 벌어졌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랭크 스텔라[화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문제에서 정부와 리처드 세라씨는 건전한 신념에서 행동했으며, 모범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책임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에 맞선 반대의견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그 의견들은 유례가 없고, 괴팍하고, 기이합니다. 정부와 세라씨는 교양이란 목적을 만족시키고자 노력하는 사회주체로서 처신했습니다. 이 경우 시각문화는 공적 공간으로 확장된 셈이지요.

그들의 노력을 뒤엎으려는 짓은 폭넓은 사회목적에 이바지하는 점이 전혀 없으며, 좀더 관대하고 참된 사회목적을 재현하고자 노력하는 정직한 사람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반대하는 사람을 꼭 만족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죠. 지속적으로 문화적 열망을 사회에서 불러일으키는 것이야말로 그것들을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일입니다.

반대하는 사람은 그들의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고 공론화하는 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충분히 이루어냈습니다. 그들의 경우 어떤 이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이제 공공기록의 일부가 됐으며 비슷한 문제를 다룰 미래의 결정에 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테죠.

이 예술작품을 파괴하고, 그와 동시에 적지 않은 공공경비를 낭비하게 된다면, 어떤 이득도 얻지 못한 채 현 상태를 교란만 시킬 겁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전례는 낭비만 일삼는 불필요한 결말만 갖게 되겠죠. 

정부의 고민거리를 늘리고 공익활동에 고심하는 예술가를 애먹일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이 문제에서 행정조치나 사법조치를 정당화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이 문제가 이런 상태로 지속된다면, 어떤 사람도 심각한 위해와 구속을 경험해보지 못할 테며, 어떤 예술작품도 다시는 보존되지 못할 겁니다.1)

이런 논란이 정부기관과 시민예술가가 훌륭히 만들어놓은 작업관계를 파괴하는 쪽으로 흘러가선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어떤 공적 토론이라도 친절하게 교양을 제공하는 역작을 까닭 없이 파괴해선 안 될 일이죠.


대니 캐츠: 내 이름은 대니 캐츠며 이 건물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내 친구 비토는 오늘 아침 나보고 교양 없는 속물이라 하더군요. 그런 말을 들었지만 서도, 나는 말해 볼 참입니다. 발언 시간이 얼마 없고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으니까, 잘 들어주시길. 

애초부터 인간요소를 간과한 이 계획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 쟁점이 무지와 예술간의 알력다툼이나 예술 대 정부의 논란으로 확대돼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말로 정부를 그다지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 버렸기 때문이죠. 그러나 나는 예술가로부터는 좀더 많은 것을 기대했습니다.

정부가 부정한 거래를 했다는 등 진부하고 위험한 추론을 예술가들이 믿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싶진 않군요. 그것이 부정한 거래이기 때문에 서민을 강철과 함께 살도록 했다는 거죠. 그런 사고방식이야말로 전쟁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일찍이 베트남과 부정한 거래를 했었지요.

이 예술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광장에 거닐 때 얻는 작은 기쁨을 훼방놓는다는 등 오만한 입장을 듣고 싶지도 않군요. 그곳은 국제규약에 따른 거대한 광장이 아니며, 강철 용기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밀봉된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하루 온종일 순환공기를 마시던 사람들을 회복시켜주던 작은 피난처이자 장소였죠. 탈출로를 봉쇄하고, 기쁨과 희망의 부재를 강조하는 게 공적 공간에서 예술의 목적인가요? 나는 이게 예술의도란 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점이 내게는 작품의 지배적인 효과였으며, 이 작품의 형태와 위치야말로 모든 결함의 근원이었죠.

나는 예술의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으나, 물리적인 공격은 물론 정서적인 인간활동을 완전히 파괴하는 짓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어떤 예술작품이라도 평범한 인간성을 멸시하고 인간의 공통된 경험요소를 존중하지 않고서 창조된다면, 결코 위대할 수 없을 겁니다. <기울어진 방주>는 항상 그런 차원을 결여할 테죠.

나는 예술작품 안에 멸시가 자리잡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이 예술작품은 좀더 좋은 곳에 홀로 서 있을 만큼 충분히 튼튼하죠. 나는 세라씨가 자신의 실수를 털어 낼 기회를 잡아야 하며, 이 작품이 좀더 아름다울 수 있는 곳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1) 원문은 “one more work of art will be preserved”이지만, 문맥을 고려할 때 ‘one more’가 아니라 ‘no more’가 맞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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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stE's InterMeDiatE WorlD : 공공미술의 모순 해설 2009-10-23 11:04:51 #

    ... 역, 서울: 학고재, 2000, p.271.에서 재인용.(2) 이 내용은 [미술이 궁금하다]에 소개되어 있고, 인터넷에도 로아 님의 번역본이 올라와 있다. http://newroa.egloos.com/2913010 (3) http://www.aam-us.org/pubs/mn/mayalin.cfm(4) "청계천 상징조형물 ‘스프링’만든 세계적인 작가 올덴버그", ... more

덧글

  • 로아 2006/12/28 00:11 # 답글

    몇 년 전에 번역했던 글. 생각해 보니, 세라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의 <기울어진 방주>를 기능도 못하는 서울시 광장에 세워놓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 解原 2006/12/30 03:21 # 답글

    이런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이렇게 출간되어 나온다는 사실이 부럽군요.
    제 취향에는, 그대로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작품의 공공성 여부도 무시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 그냥 제 맘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만일 저런 자리에 나간다면 어느 편을 들어야 할 지 모르겠네요. ㅎ~. 그냥 구경꾼이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 .)a...
  • 로아 2006/12/31 12:58 # 답글

    어려운 문제기는 하죠...
  • 선생님 2015/10/04 19:47 # 삭제 답글

    왜 예술쪽 종사자들은 이 작품을 철거하는것에 반대했을 까요
    예술쪽 종사자들도 공공의 일부이고, 이 작품으로 인한 불편함을 당연히 공감했을텐데 말이죠.
    연방정부에서 일하는 조각가가 있었다면 좋겠네요. 그 사람의 의견이 너무 궁금해요
  • 로아 2015/10/16 16:09 #

    거리를 캔버스 삼으라.

    1.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마야코프스키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세라는 광장을 캔버스로 삼은 경우죠. 그러니 이동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죠. 그것은 작업을 훼손하는 것이니까요.

    2. 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예술가들은 생각했습니다. 캔버스는 너무 좁다고, 갤러리는 사람들과 교감하기에 너무나 폐쇄된 공간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또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고, 아니 매우 추하다고. 그래서 그렇게 되어 버린 세상을 '성찰'하는 게 필요하다고, 비록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지라도 말이죠.

    3. 정확히 보셨어요. 저 역시 불편함을 다들 공감했을 거라고 봐요.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겠죠.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이유를 헤아려 보라고 한 게 아닐까요. 예술에서 찾을 것은 ‘의미’지 ‘기능’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술은 무용한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오스카의 와일드의 말로 답변을 마칠게요.

    4. 요즘 블로그를 잘 하지 않아서 답변이 늦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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