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자아, 하늘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별되지만 서로에게 결코 낯설지 않았다.”(루카치)
저 옛날 사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늘의 별을 헤아렸다. 그것은 동양에서 천문으로 서양에서 별자리로 저마다 다르게 불렸지만, 인간의 운명을 읽어내는 ‘문화적 지리’였던 것은 동일했다. 이렇게 별자리로 표현됐던 자연의 필연성Necessity은 인간의 운명necessity과 시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었다. 서로 낯설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세계는 외적 자연이고 자아는 내적 자연이니까. 인간은 말없는 ‘교감’만으로 인간 아닌 것과 소통했다. 반면 오늘날 사람은 별을 보고 싶어도 못 본다. 하늘을 봐야 별을 볼 텐데, 낮에는 장막처럼 하늘을 뒤덮은 마천루가 버티고 서있고, 밤에는 야광으로 발광하는 네온의 불빛이 시선을 홀려 버린다. 그곳에 펼쳐진 지도는 운명의 좌표를 허용치 않는다. 온몸을 찔러대고 신경을 긁어대는 인공의 섬광만이 존재할 뿐이다. 가슴을 울리는 초월적 ‘교감’은커녕, 심장을 때리는 순간적 ‘진동’만이 난무하는 현실, 김성수가 보고 듣고 있는 세계다. 그랬기 때문일까. 제목이 <Ephémère>, 즉 덧없음이요 하루살이다.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김성수는 전작인 <Neon City>에서 인간과 도시를 질료로 잡았다. 그때 그는 빛 아닌 빛을 관찰하며, 빛을 넘어선 빛을 드러냈다. 형광빛 물씬 풍기는 배경에, 하얗게 질린 듯한 모습으로, 망연히 저 어느 곳을 응시하는 인간. 그에게 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 아니다. 너무나 강렬해서 눈을 멀어 버리게 하는 빛이다. 눈이 멀었지만,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다. 게다가, 그의 망연자실한 표정 바깥에 버티고 서있는 네온 빛의 점멸하는 벽. 빛의 미로에서 인간은 완벽히 길을 잃는 것은 당연하리라. 이에 따라, 이성과 감각의 전세가 자연히 역전되어, 약동하는 감각의 물결이 견고한 이성의 성채를 노도처럼 허물어 트린다. “경험적 개념에 따른 종합의 통일은 초월적 통일의 토대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우연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상들이 영혼에 쇄도할 수 있다.”(칸트) 지각을 통제하지 못하는 영혼의 운명. 그것을 냉정히 꿰뚫어보는 김성수의 시선은 그래서 엑스선X-ray을 닮았다.

그랬던 <Neon City>를 <Ephémère>는 더욱 확장한다. 두 가지 측면이 눈에 띈다. 먼저, 세계를 좀더 깊고 예리하게 해부한다. 평면으로 점멸하던 인공창문에 정보가 약동하기 시작하며(Neon City 연작), 이러한 약동에 부합하듯 아니면 그것을 은폐하듯 인공세계의 뼈대가 돌출한다(Metallica 연작). 더욱이, 앙상하기 짝이 없는 골격은 <사루비아 다방>의 날것같은 공간과 호흡하며 더욱 날카로워진다. 세계의 분석이 한결 명확해진 셈이다. 다음, 덧없음의 속성이 작품을 넘어 과정에 침투한다. 김성수는 두달 동안 전시공간에서 직접 작업하여 설치하고, 이 과정을 비디오 찍어 상영한 후, 전시가 끝날 때 작품을 철수하지 않고 소멸시킨다고 한다. 말 그대로 덧없음의 삼위일체적 실천이다. 내용의 덧없음이 과정의 덧없음은 물론이요 형식의 덧없음으로 확장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부유하는 기호들만 있는 것은, 안쓰럽게도 정당해 보인다. “19세기의 인간은, 우리의 유령 같은 시간은 영원히 고정되며, 항상 우리를 같은 시간에 되돌려놓는다.”(블랑키) 어쩌면 21세기의 인간은 긴 우회 끝에 옛날로 회귀하기 시작한 것인지 모르겠다. 정신은 없고 육체만 있는 시대로 말이다. 다만 한 바퀴 굴렀기 때문에, 예기할 미래조차 상실했다는 점이 그때와 다를 뿐. 이것은 현대가 예술사적으로 아이러니의 시대라는 것도 방증한다. ‘인간 이하’요 ‘이성 이하’란 것이다. 교감 대신에 이성 대신에 신경만 남은 것이 과연 남는 장사인지는 (올 수나 있을지 모를) ‘미래’에 평가할 문제다. 
덧붙여, 작가조차 물화된 시선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못내 걸린다. 물론, 김성수의 작업은 젊은 세대의 인간포토샵 작업과 다르다. 몸소 프로그램이 되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대로 정보를 방출하는 것과 달리, 그는 적어도 ‘관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의 담지체조차 ‘능동적 사유’는 아니다. 물화된 현실을 물화된 시선으로 ‘반작용’하기 때문에, 그것의 한계는 애초부터 자명하겠다. 하기야, (주체의 마지막 생존자인) 작가야말로 오늘날 온몸/안팎으로 물화/불화를 첨예하게 겪고 있으므로, 김성수의 작업자체가 징후일지 모르겠다만, 사물이 되서는 애써 육체에 남겼던 관찰조차 무화되지 않을까.
<artinculture> 2월호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