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04월 20일
![]() 사진이 역사에 등장했을 때, 여러 가지 논란이 일어났다. 특히 사진이 과연 예술인지 많은 논쟁이 따랐지만, 벤야민은 문제가 제대로 설정되지 못했다며 한탄했다. 그가 보기에 사진이 예술인지 묻는 것은 구시대의 착각이었다. 왜냐하면 사진은 예술의 특성자체를 뒤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진이 드러내는 학문과 예술의 통일에서 확인된다. ‘약호 없는 전언’의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벤야민과 다른 생각에서 터져 나온 오스카 와일드의 한탄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술을 마치 일종의 자서전으로 대하는 시대에 살고 있네.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상적인 감각을 잃어버렸어.” ‘아름다운 가상’을 창조하기는커녕, 세계를 그대로 베껴낸 것만으로 예술이 된다면, 더군다나 인간을 밀어내고 기계의 힘으로 제작된 것이라면, 어떻게 예술이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세계사의 운동을 거스를 수는 없었고, 사진과 영화는 시각의 영토를 조금씩 넓혀 갔다. 일찍이 바쟁이 꿈꾸던 리얼리즘의 제국은 기계의 중립성 위에서 견고하게 구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벤야민의 진단은 시간이 갈수록 그의 예상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학문과 예술의 통일은 사진을 뛰어넘어 현실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학문의 대상인) 실재와 (예술의 대상인) 가상의 통일이기도 하다. 홍성도의 <Torurist>는 이러한 변화를 드러내는 한 가지 징후일 것이다.
홍성도의 작업개념은 단순하다. 전시의 제목을 반영하듯, ‘여행자’로서 세계 곳곳을 담았지만, 그다지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동일한 장소를 시간을 달리해 찍은 사진 두 장을 겹쳐놓는 ‘방식’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겹치는 작업은 옛날부터 존재했다. 그런데 시기와 의도에 따라서 방식은 상이했다. 처음에는 겹칠 때의 이음매를 은폐했으며, 다음에는 이음매를 역으로 사용했다. 전자는 내용적 윤리의 문제가 얽혀들며, 후자는 형식적 전용의 문제가 떠오른다. (왕왕 논란이 되는 보도사진 조작문제와 최근의 강홍구의 작업을 사례로 들만 하다) 홍성도의 작업은 두 가지 방식보다 급진적이다. 이음매가 사진의 바깥에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겹쳐있는 탓에, 입체주의의 콜라주를 연상하게 하지만, 동일한 효과를 생산하진 않는다. 덧붙여도 사진의 효과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인지, 어찌 보면 사진에 실재라는 군더더기가 붙어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포토넷> 5월호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