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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5월 26일
![]() 가정의 달 5월. 기념할 날이 많은 달이다. 어린이날은 유원지에서 솜사탕을 먹어야 하고, 어버이날은 카네이션을 달아야 하고, 스승의 날은 편지를 써야 한다. 외에도 성년의 날도 있고 노동절도 있다. 더 있으나, 이하 생략. 아마 가족과 관련된 기념일이 많아서, 가정의 달이라 부르는 것 같다. 찾아보니, 5월 21일 부부의 날도 있다. 공식으로 지정되지 않은 탓인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혼율 운운하고 자살의 원인을 분석하는 식으로 신문에서 부부의 날을 축복하는 정도다.
그렇게 기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 과거를 일깨우는 의식일 것이다. 이때의 과거란 개인의 기억일 수도, 국가의 이념(타자의 욕망)일 수도 있다. 원래부터 깃든 것인지 나중에 만든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줄곧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온갖 기념행위는 하얗게 빛바랜 옛날 옛적 기념사진과 무척 닮아 보인다. 어느 곳에 있든 똑같이 뻣뻣한 몸놀림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들이란, 마치 살아있는 기념물 같다. 그곳에 왔던 사람은 사라지고, 왔다는 흔적만 웅변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념의 인형사들, 이념은 ‘국기에 대한 맹세’에 있지 않다. 몸속에 박혀서, 어느덧 되뇌는 혓바닥에 있는 것이다. 어디 혓바닥뿐이겠는가. 스스로 선택해 한다고 믿는 행동들, 의지를 배신하기가 다반사다. 개인의 습관과 국가의 의례는 그래서 다르지 않다. 이번에 살펴볼 금호미술관의 <It takes two to tango> 전시도 비슷하다. 방식과 질료만 다를 뿐, 똑같은 양상이 반복된다. 앞서 지적한 ‘의례’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 전시의 초점은 제목 그대로 ‘부부작가’ 전시다. “작품 할 땐 훌륭한 자극제, 가장 큰 힘 되는 동반자죠.”(<중앙일보> 5월 8일) 이것이 정답일 것이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곳을 가는 것, 완벽한 ‘반쪽’의 이상이 아니던가. 그렇게 가고 있으니, 당연히 작업도 좋아야 마땅하겠다.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으련만. 과연 부부작가가 한 몸이 돼서, ‘변증법적 통일’의 효과를 이루어 냈을까. 부부작가 면면을 보면 다양하고 화려하긴 하다. 평면작업도 있고(김태희와 박희섭), 매체작업도 있고(원성원과 이배경), 동양화작업도 있고(강미선과 문봉선), 설치작업도 있고(이소영과 김건주), 여러 가지 섞인 것도 있다(김민정과 신치용, 김지원과 박소영, 오병재와 백연아). 아무리 생각해도, 글쎄올시다. 서로 했던 작업을 같이 걸어놓은 정도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굳이 찾는다면, 신치용이 ‘매체’의 평면적 무의식을 입체로 투영하고, 김민정이 비디오‘매체’로 작업을 한다는 것인데, 관련이 있기는 한지 의심스럽다. 이배경과 원성원의 경우도 비슷하다. 공간・매체를 형식적으로 탐구하는 이배경과 디지털기술로 환영의 공간을 구축하는 원성원을 보면, 전시를 위해서 새롭게 해본 것인지 모르겠으나, 저마다 견지했던 작업의 성향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가름하기 어렵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례도 있다. 강미선과 문봉선의 경우, 동일한 장르가 뿜어내는 ‘공감’이 분명히 존재한다.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묘하게 충돌한다. 그럼에도, 전체로 봤을 때 작업의 결합은 전략 없는 병치에 가까웠다. 전시를 준비하며 부부끼리 당연히 조율하긴 했겠지만, 한 두 조합으로 역부족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작가의 잘못이 아니다. 기획이 허술한 탓이다. “가족의 의미와 미술계에서 미술인부부의 역할과 이들이 그려내는 한국 미술의 흐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전시서문) 솔직히 빈말이다. 가족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작가부부가 정말로 한국 미술계에서 유의미한 활동단위인가. 그러니, 감동도 없으며 흥미도 떨어진다. 얼마간 애매한 구석이 없지 않다고 반박할 만도 하다. 상업공간이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올만한 전시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일종의 내재적 기준을 적용하자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례적 기획과 진부한 연출이 가려지진 않는다. 차라리 서로의 작업을 작업해 보라고 하든지.
그랬던 탓인지, 똑같은 몸짓을 의례로 반복하는 기념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다만 작업이 사람을 대신하고 있는 것만 다를 뿐. 특히 여성지에나 나옴직한 부부의 해맑은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거기서 나오는 부부의 표정이란 누가 됐든 어찌나 똑같은 모습인지. 솔직히 묻고 싶다. 정말 행복한지, 정말 그렇다면 배워서 나눠 갖고 싶다. 그런데 아니지 않는가. 우습게도 여성지만큼 가족과 부부의 ‘끝장’을 정밀히 추적하는 잡지도 없다. 누가 어떻게 이혼을 했고, 재산은 어떻게 나눠 가졌고 등등, 피가 철철 흐르는 현실을 매끈한 기사로 포장하면서, 뺨치고 어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부부이기 때문에, 묻히고 묻었던 상처가 좀 많았을까. 그것은 소일거리 가십이 아니라, 뼈를 깍듯 작품에 새길 주제다. 감추는 것이 좋을까, 들추는 것이 좋을까.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도 믿고 싶다. 억지로 짜 맞춘 행복한 거짓보다, 소박한 진실의 울림이 깊은 것이라고.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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