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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6월 18일
![]() 우리는 매일같이 무엇이든 본다. 하지만 비치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짙게 어떤 것은 엷게, 어떤 것은 지워지고 어떤 것은 드러나고, 어떤 것은 못 본체 어떤 것은 알은 체, 나타난다. 관심의 차이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생리학을 끌어들여, 시지각이 어떻느니,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정도인지, 설명할 수도 있다.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단순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혼란과 문제가 해결되면 좋으련만, 원하지 않을 만큼 세상은 친절하지 않다. 맘대로 들어와 시선을 흩트려 놓는다. 맘속을 기어이 할퀴어 놓는다. 그렇기에 본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솔직히 축복이다. 안 아플 수 있기 때문이다. 야릇한 노릇이다. 갖지 않아야 조금이나마 행복할 수 있다니. 인간의 기억만큼은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해도, 달갑지 않고 개운치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신을 어찌 됐든 보호할 생각에, 의식하든 하지 않든 기억하지 않은 것, 그것은 두려운 일일까, 쓸쓸한 일일까. 매일매일, 나도 모르게 나 아닌 어떤 존재를, 나 아닌 어떤 존재가 나를, 잃어버린다. 나는, 너는, 그렇게 서로를 잊혀져 가는구나. 그런 잃어버림, 그런 잊혀짐, 바로 이혜승이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혜승은 무엇인가 그리지 않음으로써 무엇인가 그려낸다. 마치 기억처럼, 마치 찾지 못한 채 어딘가 숨겨져만 있을 옛날의 앨범처럼. 그래서 빈 듯한 여백이야말로, 그녀의 그림과 기억에 접근하는 열쇠가 된다. 또한, 그 열쇠는 우리 모두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이혜승의 작업을 보면 무엇보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녀가 ‘온전히’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런 그림은 많다. 저 옛날 정물화도 있고, 상품을 채워 넣은 팝도 있고, 아예 개념이 득세하는 작업도 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제거되는지, 그것의 방법이겠다. 흥미롭게 그녀의 작업은 사람이 없으면서, 사람의 흔적이 짙게 나타난다. 그것도 언뜻 보기에 맥 빠진 것처럼, 어떻게 보면 낮게 가라앉은 것처럼. 어떤 장소이긴 하지만, 어떤 장소인지 분간하기 힘든 곳들,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지웠을까. 장소를 하나씩 짚어보면, 실마리가 나올지 모르겠다. 빼곡히 책이 늘어선 서점, 덩그러니 그림 한 장 붙는 어떤 벽, 어둡게 내려앉은 지하보도, 녹음이 빡빡한 바깥이 보이는 실내 등등.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인다. 너도 나도 매일 같이 보는 풍경이다. ‘매일 같이’, 어쩌면 풍경은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흔히 말하는 일상, 제식처럼 똑같이 반복되는 삶의 몸짓들, 그래서 생각도 못하고, 그래서 느끼지도 못하는 지루한 삶들. 그것은 보는 것이되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가라앉은 기억처럼 짓눌려서. 어쩌면 망각은 마취제일지 모른다. 고통을 잠시 동안 눌러놓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래된 ‘안과 바깥의 범주’가 요긴하리라.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바깥이 아니다. 바깥은 그녀의 안이 나타날 때 필요한 ‘무엇’ 정도일 뿐이다. 그러니 막연할 수밖에. 사람은 ‘대명사’와 대화하지 못하지 않는가. 대화가 없으니 따뜻한 교감은 기대할 수도 없다. 그녀의 시선은 그렇게 튕겨 나온다.
튕겨져 나온 시선들, 시선들, 시선들. 보이지 않는 장막이 곳곳에 펼쳐져, 사람들 ‘사이’를 틀어막고 있는 것일까. 갈 곳을 못 찾은 시선은, 끝끝내 사물로 향한다. 그리고 스스로 사물이 된다. 저 옛날 만물과 ‘공감’하던 정령이 뛰노는 시대로 돌아간 것일까.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내가 네가 되는 합일과 공감의 세계가 펼쳐진 것일까. 바깥의 손길 때문에 힘들게 ‘나’를 느끼지도 않고, 언제나 결단의 문제 때문에 ‘나’를 괴롭히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우리가 단지 자연의 자녀였을 때 우리는 행복하고도 완전하였으나, 자유로와지면서 이 둘 다 모두 잃고 말았다.”(쉴러) 모르겠다. 서로의 두뇌를 잇는 전선이라도 있다면 가능할 지도.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만 아니다. 오늘날 인간이 접하는 사물은 친근한 자연이 아니다. 맨발을 부드럽게 감싸는 대지가 아니다. “이러한 자연은 더 이상 내면성을 일깨우지 못하는 경직되고 낯설게 된 의미의 복합체, 즉 이미 죽어버린 내면을 모아 놓은 시체실이다.”(루카치) 우뚝한 콘크리트 벽들, 창문을 가득 채운 벽들, 이혜승의 그림엔 그런 벽들로 채워져 있다. 바깥은 벽들 사이에서 겨우 자신의 ‘있음’을 알릴뿐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녀의 창문에 비친 바깥이나 벽들 사이에 나온 바깥이나, 온전히 바깥처럼 보이질 않는다. 시제는 당연히 ‘과거’다. 그것도 날짜를 매길 수 없는 막연한 과거다. 인공의 벽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렇게 이제는 기억마저 자연의 빛깔을 잃어버린다. 그림의 서늘한 빛깔처럼, 깨끗이 탈색돼 버린다. 그녀의 ‘창문’에서 공간은 막히고 시간은 빛이 바래는 것이다.
“과거 속으로 멀어짐에 따라 진실성도 줄어든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로브그리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과거를 마음에 묻고서 살아갈까.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리라. 그녀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산 것’을 ‘죽은 것’으로 바꾸며, 아니 그렇게 바뀌어 가는 것들을 쓸쓸히 떠나보내며, 혼자만의 의식을 치러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지 않는 것은, 그녀의 그림뿐이리라. 더불어, 그것이 예술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실낱같은 힘일 것이다. <I M 아트 갤러리>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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