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상당히 무용한 것이다.(오스카 와일드)2006 년 6월 5일, 경복궁 뒤편 부암동 산자락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이름하여 <레드 벨트> 붉은 장막이, 이름도 생뚱맞게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에서, 펄럭였다. 부암동이면, 80년대 흑백영화에나 나옴직한 동네다. 오르막 산자락인데다, 길은 2차선이고,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고, 풍경은 흑백이고 등등, 게다가 가기도 힘들다. 인근 주민이 아니라면, 하루에 한 두 명 오면 많다 싶을 정도로, 서울에서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몇 군데 안 되는 동네다.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지하철 한번 마을버스 한번, 힘들게 길을 찾아서 갤러리에 가도, 전시를 볼 수 없다는 것. 보는 것은커녕, 총 든 사람이 입구를 턱하니 가로막고 있다. 입장불가라니, 열려라 참깨를 외칠 수도 없고, 이렇게 저렇게 말을 붙여 사정을 해봐도, 들어갈 수가 없다.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을 저버리는 처사가 아닐 수 없겠지만, 아쉬운 것은 보려는 쪽이라서, 눈길을 문틈에 우겨넣을 수밖에. 사실 막아 봐야 막힐 사람이 거의 없는 까닭에, 정말 무용한 짓처럼 보이지만, 전시는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일까, 자문하는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문’이 얼씨구 열린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이야말로, 이 전시를 경험하는 요체이기 때문이다. 즉 이 전시는 역으로 관객에게 질문하는 동시에, 전시의 태업을 정당화하는 셈이다.

솔직히 조금 의외긴 하다. 신창용과 이완의 작업을 생각하면, 그렇다. 둘 다 자기 경험에 충실한 유쾌한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가 아니던가. 비슷한 또래의 그들은 각기 ‘대중문화’의 경험을 나름대로 소화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신창용이 어릴 적 우상인 이소룡을 2차원 평면에 ‘화려하게’ 등장시킨다면, 이완은 일상의 소품을 3차원으로 ‘재치 있게’ 변용시킨다. 지금까지 <레드 벨트>처럼 제도를 겨냥해 개념적 공격을 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조금 의아할 수밖에.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엿보인다. 즉 작업의 규모와 범주가 달라졌을 뿐, 그들의 공통된 유쾌한 태도는 여전한 것이 아닐까. 조금 섬세히 따져보면, 신창용의 ‘힘에의 동경’이 액자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고, 이완의 ‘소품의 변용’이 공간의 치환으로 바뀐 것이라고, 볼만 하다. 그러니, 이제 문제를 바꿔 물어야 한다. 그들의 ‘동기’는 어떻게 전화된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점화시킨 것일까.

요 즘 한국미술계는 어느 때보다 호황이다. 눈먼 돈도 유입되고, 나날이 시장도 커져가며, 여기저기 ‘sold out’을 외치며 잭팟을 터트리는 작가도 생겨났다. 나쁠 것이 없는 일이다. 낡은 미술시장도 합리화되고, 작가도 재생산할 조건을 마련할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속도’다. 그렇게 멀었던 자본과 미술의 거리가 어느 틈에 좁혀졌는지, 자본이 미술을 포획하는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요즘 미술계의 큰손인 대형갤러리가 하는 모양새를 보라. 마치 금광을 캐듯 새로운 작가를 저인망그물로 포획하기에 여념이 없다. 보이지 않는 손은커녕, 눈이 벌개라 쫓아다니는 것이다. 특히 젊은 작가가 표적이 된다. ‘저렴’한데다가, 상종가를 치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잘 팔려도 문제고 안 팔려도 문제다. 별로 벌지도 못한 채 일회성 소모품이 되거나, 아예 관심도 못 받고 소외되기 일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안이 오면, 거절하기 힘들다. 언제 또 기회가 오겠는가. 그들의 선택은 결국 모 아니면 도다.

<레드 벨트>는 바로 그 지점에서 ‘레드 카드’를 내민다. 물론 그들의 ‘사단’은 한계가 분명하다. (그것조차 어떤 꼬마가 엄마와 근처를 지나치다, 호기심이 동했는지 엄마를 조르고 문지기를 졸라서, ‘붉은 장막’을 무너트렸다고 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자락에서 어느 누가 그들의 목소리를 듣겠는가. 또한, 그들은 단지 방어적인 ‘태업’을 했을 뿐이다. 유쾌한 농담이지 무거운 진담이 아니란 것이다. 후자가 되면 서로에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이 틀림없다만) 특히 그들에게 곤란할 테니까 말이다. 적어도 지금은 혁명의 예술과 예술의 혁명이 휘몰아치던 20세기 초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들의 노력은 무용할 뿐인가. 그렇다,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들의 뻔한 해프닝이 드러낸 것, 그때 잠깐 벌어진 ‘거리를 의식하는 것’이 관건이다. 기왕에 먹힐 바에야, 혓바닥이라도 놀려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예술가는 자나 깨나 광대지, 혁명가가 아니잖은가.
<아트인컬쳐>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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