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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8월 02일
중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의 성교intercourse가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인터페이스interface다.(스텔락)
1. 물에 비친 자신에 홀려서 물에 빠져 죽었다는 나르시스, 과잉된 자기애를 설명할 때 흔히 언급되는 신화적 이야기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자기애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훨씬 중요한 두 가지 양상을 집어내야 한다. 하나는 ‘자기를 본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를 비추는 ‘매체’가 나타난 것이다. 비추는 매체가 물이었고, 그 탓에 또렷하지도 않았지만, 인간이 자연에서 자연과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한 징후이리라. 그렇게 보면, 나르시스는 자신을 봤으되, 자신인지 몰랐던 시대를, 어렴풋이 드러낸다. 자신을 자신의 바깥에 투영시키지 못했던 역사적 시기였던 셈이다. 이러한 자연의 물은 곧바로 인공의 청동으로 교체됐다. 이 역시 작지 않은 변화였다. 반영의 매체가 자연의 껍질을 벗어 던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신화의 시대는 물러나며, 역사의 시대로 돌입한다. 허나, 자연은 인간을 여전히 쥐락펴락했다. 또한, 청동이 비추는 자기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시간은 조금 더 필요했고, 어김없이 시간은 지나갔다. 근대가 찾아온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거울과 자화상이 동시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인간 ‘주체’는 이제야 올곧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직접 볼 수 있게 된 그는, 똑같은 방식으로 곧이어 세상을 굽어보기 시작한다. 근대주체는 평면의 화면에 인공적인 원근법의 질서를 새겨놓듯, 인공의 질서로 세상을 바꿔놓기 시작한다. 인공의 신경인 철도가 산을 뚫고, 인공의 뼈대인 마천루가 하늘을 찢으며, 결국 인공의 현실인 대도시가 밤하늘에 반짝인다. 반자연의 완벽한 승리. 타락한 파리를 노래했던 보들레르는 무정형의 자연을 증오했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을 넘어섰고 거부했다. 2. 거울은 현대에 들어서 과격한 변화를 꾀한다. 과잉된 ‘자신’의 영상이, 기기묘묘한 방식으로, 곳곳에 넘쳐나기 시작한다. 매체의 혁명이 이룩한 결과였다. 요즘에 등장하는 디지털혁명은 그것을 집약한 표현이지, 전부를 설명하진 못한다. 영화, 카메라, 텔레비전, 비디오 등등, 디지털혁명 이전부터 ‘자아(주체)’를 비추는 매체는, 끊임없이 ‘자기’를 복제했다. 처음에는 한 두 명의 사람이, 오늘에는 모든 사람이, 기술에 바탕해 얼씨구나 자신을 복제한다. 끊임없는 분열의 확산인 셈이다. 달라진 양상은 자기・정신・분열의 기제가 ‘기계’라는 것이다. ‘정확한’ 기계는, 정확한 영상을, 대량으로 살포했다. 오늘날 디지털매체는 이것을 극한으로 전개한다. 자기 자신이, 남이 자신을, 언제 어느 때라도, 복제한다. 정보의 바다가 과연 생명의 모태일지 소멸의 구멍일지, 가름하기 힘들 정도다. 여기서 거울 또한 사라진다는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적어도 옛날 모습을 기대하긴 힘든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시선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비추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란 점을. 거울은 형태를 변환하여, 반영의 임무를 여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한다. 이훈은 바로 그것을 보고 있다. 반영과 엉켜든 주체와 정체의 문제를 표현하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익숙해져 이제는 보지 못하는 거울이란 ‘형식’을, 매체혁명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주체의 운명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3. <Where am I>에서 이훈은 두 개의 작업을 선보인다. 첫 번째 작업은 거울이자 액자이다. 여기서 그는 익숙한 그것들을 낯설은 매체로 바꿔놓는다. 자신의 모습이 일순간 디지털의 입자로 분해되기 때문이다. 알려졌다시피, 매체혁명의 전장에서 주체의 반영이란 여러 차례 ‘처리’되고 ‘매개’되는 정보일 뿐이다. 그곳에서 정체성은 무수한 매체의 매개된 결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디스크에 정보가 저장되는 방식을 생각해 보라. 순수한 인공의 논리에 따라, 이산처리된 정보들이, 아무런 연관도 없이, 디스크 이곳저곳에 기록된다. 물론, 디스크를 최적화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처리속도가 빨라지긴 하겠다. 인공의 저장매체인 컴퓨터를 보조기억장치로 사용하는 인간의 운명이겠다. 일찍이 플라톤이 ‘비전esoteric’과 ‘평전exoteric’을 구별한 것도 되새겨 볼만하다. 그는 철학의 정수를 일반대중에게 공개하지 않고, 은밀하게 제자의 ‘기억’에만 전수했다. 어쩌면 매체의 발전은 주체의 퇴행과 비례할지 모른다. 인간의 능력을 조금씩 앗아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한스 모라벡은 정신을 ‘내려받기’할 날도 얼마 안 남았다고 큰 소리 친다. “결국 모든 것이 거의 광속으로 전개되는 정신의 포말에 되기에 이르기까지, 육체들은 사이버공간의 전자행렬들로 변환될 것이며, 조악한 육체 변화과정들은 한결 빠르고, 지각될 수 없는 사이버공간적 변환들로 대체될 것이다.” 이훈의 작업을 완성하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는 분해된 자화상을 축복하는 것일까 저주하는 것일까. 4. 두 번째 작업은 조금 복잡하다. 원형의 설치가 있으며, 관객을 응시하는 카메라가 쫓아오며, 그 너머에 물과 관객을 쫓는 영상이 겹쳐진다. 덧붙여, 카메라의 운동에 발맞춰, 원형설치 내부에서 막대가 운동하며 물을 떨어트린다. 따라서 관객은 네 가지 감각을 동시에 수용한다. 설치의 존재, 카메라의 응시, 물의 소리, 관객과 물의 영상의 혼합. 또한 관객과 물은 실재이자 가상으로 실존하며 재현된다. 여러 소재와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만, 결국 매체가 매개한 존재의 ‘끝장’을 보여주는 점은 다르지 않다. 혼합된 영상에서 물은 화소의 물결에 따라 이리 저리 이지러지며, 화소로 분해된 관객의 모습은 심히 낯설고 뚱해 보일 뿐이다. 달리 흥미로운 것은 이훈이 물을 (작품에서 반복해서) 끌어들이는 점이다. 일찍이 물은 존재의 모태의 상징이다. 어쩌면 자연으로 회귀할 실낱같은 실마리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자연은 훈훈한 볼거리가 아니면, 쓰나미처럼 문명을 위협하는 힘으로 재현될 뿐이다. 결국 우리가 돌아갈 곳은 사라진지 오래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훈이 재현한 물조차 매체의 손아귀를 빠져나가진 못한다. 5. “상호작용예술은 수용자와 컴퓨터체계의 관계를 사회화하 고자 한다.”(Dinkla) 이훈의 작업을 포함해 매체예술이란 ‘현상’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제는 반영을 넘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알게 모르게 설치된 곳곳의 매체・기계를 떠올려 보라. 의식조차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원래 인간 상호 간의 관계를 지적하는 ‘상호작용’의 개념이 매체예술로 ‘전이’된 것은 그런 징후를 솔직히 드러낸다. 인간 대신 기계와 소통하는 상황은, 역으로 기계를 ‘매개’로 활용하는 정도를 뛰어넘어, 아예 기계가 ‘되는’ 지경이다. 악몽 속에서 몽상을 실현하는 것인지, 몽상 속에 악몽을 실현하는 것인지, 원하든 않든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김진혜 갤러리>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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