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 순일 본 사람 없소, 가냘픈 몸매에 새까만 눈,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요, 가난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서울로 간 순이.(송대관, <우리 순이>)지금은 철골과 유리로 미끈한 자태를 뽐내는 서울역, 새로운 문명의 21세기를 열고 싶은 욕망을 물씬 풍기며, 낮에는 유리로 밤에는 조명으로 세상을 반짝인다. 하지만 그것은 서울역이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서울역’은 새역사 바로 옆에 빌붙어, 이제는 들어갈 입구조차 막혀버린 존재다. 지금에 보면, 새끈한 새역사와 비교되어, 위용을 자랑했던 우뚝한 돔도 육중한 기둥도 촌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한때는 그것의 존재가 서울 자체이자 한국 자체였을 때가 있었다. 이제는 자가용도 많이 늘었고 비행기도 자주 다니기 때문에 위상이 추락했지만, 서울역을 오고가는 기차의 행렬은 60년대와 70년대 한국의 질주하는 근대를 상징했었다. 새벽부터 자정까지 가쁜 숨을 고르며, 서울역은 거침없이 사람과 물자를 열심히 토해냈다. 그렇게 쏟아진 사람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군인과 아이는 물론이요 봉급쟁이와 갓 상경한 어중 떼기까지, 일상에서 섞일 수 없는 온갖 종류의 계층이 서울역광장에서 ‘한 무리’가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바로 삼삼오오 뿔뿔이 흩어진다. 이때 대오에서 튕겨 나오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순이다. 송대관의 말마따라, 아무것도 몰랐던지 그녀는 언제나 남자의 손에 붙들려, 어둠 속으로 속속 사라졌다. 칭얼대는 신파처럼 들릴지 모르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갸웃거리는 순이의 얼굴에는 질주하는 한국이 놓쳐버린 놓아버린 무엇이 숨겨있기 때문이다. 너무 가파른 흐름에, 어디에 어떻게 몸을 맡겨야 할지 모르다가, 결국엔 남의 손에 이끌려 휘둘렸던 바로 한국의 다른 얼굴과 겹쳐졌던 것이다. 자의반 타의반 고도성장의 발판이 되었던 그녀였지만, 기껏해야 <대한늬우스>에서 미싱 앞에 일렬종대로 기계로 비쳤거나,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빨간 조명을 받는 고깃덩이로 나타났다.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어디고 갔을까. 강홍구는 그랬던 그녀를 불러들이려 한다. 하지만, 눈에 비친 것은, 폐허 같은 광장에 덩그러니 인형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인형이었을까.

꾀죄죄한 외양을 한 꺼풀 벗었을 때 만좌중에 드러난 그녀의 내부에서는 분명히 건강한 동물성 같은 게 숨쉬고 있었다.(윤흥길)
1970 년대 20대였던 순이와 2000년대 50대의 아줌마. 30년이란 시간의 간격만큼, ‘아줌마’의 억척스러움은 순이의 순박함과 격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역광장에서 어쩔 줄 몰랐던 그들은 지하철에서 너무나도 당차게 움직인다. 어떨 때는 거침이 없는 것이 거의 자기 집 안방이다. 빈자리는 자기 것이고, 통로는 무한질주다. 양보를 하지 않는 그들, 타인을 전혀 생각지 않는 그들, 간혹 그들의 억척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어쩌면 한국의 동력이지 않느냐고 하지만, 악다구니의 모습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그들은 변한 것일까,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강홍구가 찾아낸 그녀는 이러한 통념을 뒤로 한 채, (인형의 모습을 하고서) 의외로 수줍은 모습처럼 보인다. 좌석 한 귀퉁이에, 주위라고 해봤자, 흰 셔츠 반쪽만 나란히 한다. 어떻게 보면, 서울역은 그렇다 쳐도, 지하철에서 그녀는 말 그대로 시대착오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으로 실마리는 그곳에 있지 않을까. 즉 시대착오와 대응하는 자기 집 안방 같은 공간착오. 핸드폰에 MP3에 PMP에 등등, 온갖 1인용 매체로 공적 공간조차 사적 공간으로 전화되는 지금, 그녀는 아직까지 자신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이곳저곳 떠도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공적 공간도 사적 공간으로 만들어, 어떨 때는 양반다리를 하고서 전화 거는 안방처럼, 어떨 때는 수다 떠는 툇마루 마실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인형으로 혼자인 그녀는 그래서, 수줍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적의로 가득 차 보인다.

사체로부턴 유물이 나오며, 경험이나 미화된 그 죽어버린 과거의 사건들로부터는 추억이 나오는 것이다.(벤야민)
이제 순이는 ‘긴급상황’을 알리며, 마치 목이라도 매단 듯한 모습이다. 그것도 위에 놓인 전화기를 외면하고서 말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맥락도 이유도 명확치 않다. 게다가, 무생명의 인형에 올가미를 씌운 탓에, 죽음의 의미조차 자연의 사물처럼 덤덤하게 다가온다. 신화적 사건처럼 극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순박한 그녀는 처음부터 없었을지 모른다. 다만, 어느 누가 그렇게 보상받고 싶었던 것이겠지. 인텔리의 연민은 독보다 나쁘며, 연민되는 대상보다 연민하는 주체의 도덕적 알리바이가 되기 쉽다. 순박한 그녀를 현실의 은유로 삼았던 수많은 예술들이 거짓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한국은 너무 오랫동안 현실(주의)의 무게에 짓눌렸다. 그녀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이제는 벗을 때가 됐다. 그녀는 희망과 절망을 오고가며 재현됐지만, 역사가 남긴 것은 무거운 짐과 달갑지 않은 호칭밖에 없다. 현실의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결코 추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순이는 일종의 ‘신화’였던 것이다. 강홍구는 그런 신화의 무게를 가볍게 덜어낸다. 우의로 장례를 치르는 셈이요, 인형이 등장한 까닭인 것이다.
<중앙선데이>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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