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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09일
우발적 커뮤니티
우연히 전시 여는 글을 읽다가, 구역질이 나올 뻔 했다. 솔직히 욕밖에 안 나온다. 이런 글을 버젓이 쓰고 있으니, 미술이 엉뚱하게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지. 논증할 능력이 없으면, 개념을 쓰지 말아야지, 이런 식으로 나열하면 어떻게 읽으라고. 개념을 인용하는 것과 사용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글이다. 이론과 개념에서 어떤 착상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들로 도배를 해서야 쓰겠나.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은 균열과 기이함을 지니며 이질적이며, 비균질적이고 비대칭적이며, 비약적인 관계들을 또한 내포하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계기 가운데서의 우발성, 이것이 마련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속에는 어떤 운동성 또한 포착된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 (Giorgio Agamben)은 운동(movement)의 개념을 고찰하면서 "운동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운동은 거기에 없으며, 운동이 거기에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운동은 거기에 있다 "라고 언급하며, 진정한 운동은 잠재태로서의 잠재태의 구축이라고 말한다. 그에 반해 일반적으로 일컫는 운동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을 자르고 분할하는 단절이 있으며 이 경우 적을 명확하게 하게 되고 여기에서 다시 운동은 비정치적인 것(대중이나 사람들 )에 대해 정치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문제점들이 발생하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운동이 시작되는 곳에서 민주주의는 끝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운동의 개념이 존재론적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운동이란 구체적인 목적을 띄지 않고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태동가능한 무엇이다. 또한 이것은 냉철한 인식과 존재적 실천을 통해 개입해 나가는 단독자들(singular being)의 결합으로 이들은 자기 가운데서 타자를 호명한다. 비균질, 비대칭, 우발성, 잠재태, 운동성, 단독자, 호명 등등, 각기 맥락이 다른 이론에서 튀어나온 개념들이 난무한다. 그래, 단토가 말한 대로, 재현하는 예술을 갈음해, 철학하는 예술의 시대가 열렸다고 치자. 그렇다고 서문까지 철학을 해야 할까. 아무리 좋게 봐도, 얼치기 철학적 글쓰기 이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인용된 문장을 보자. 글을 어지럽히기 딱 좋은 방식이다. 저런 식의 인용은 문장의 함축과 무관하게 ‘잠언’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음에 이어지는 ‘잠재태로서의 잠재태의 구축’이란, 도대체 글쓴이가 잠재태의 정의를 알고나 있는지 미심쩍다. (내가 아감벤이란 이탈리아 철학자를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운동은 잠재성이 현실화되는 것을 지칭한다. 뭐 하기야, 대체로 어느 포스트주의에 감명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여, 고전 중에서도 고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쯤이야, 창고 구석에 먼지나 풀풀 뒤집어쓰고 있지 않냐고, 가볍게 웃어넘길 것 같긴 하다만, 이런 글은 정말 아니다 싶다. 문제는 이 글이 서문이기 때문에 가중된다. 길을 내야 할 서문이 오히려 길을 닫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이 글을 음미하고, 전시를 속 편히 감상할 수 있을까. 게다가 문장도 안 된다. ‘되어지는’ 정도는 양호하고, 쓰지 말아야 마땅할 번역투의 ABC가 다 있다. 첫 문장부터 영 마뜩찮다. 본 전시는 합목적성을 지니지 않은 공동체, 우발적인 촉발, 그리고 그것의 잠재태로서의 운동성 등을 이야기하게 된다. 전시가 말하는 "공동체(Community)"의 개념은 정치사회적인 태도들에 대한 직접적 선언이나 액티비즘의 외부에 놓여져있는 잠행적인 개별자들의 연대로써 , 사회에 우회적인 발언과 존재적 실천을 통해 개입해 나가는 Singular(특유)한 존재들의 존재론적 접촉으로 접근될 수 있는 '이미 도래해 있는(그러나 발굴되어야 할) 혹은 장차 도래할 공동속의 존재들'을 말한다. ‘ 본 전시는 이야기하게 된다’도 목에 걸리고, ‘액티비즘의 외부에 놓여져 있는 잠행적인 개별자들의 연대’도 목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 어지럽힌다. ‘정치적 행동주의 바깥’에 의미도 불분명한 ‘잠행적인 개별자의 연대’라니, 지금까지 내가 배웠던 철학과 문법이 일거에 무너지는 듯하다. 수사인지 무엇인지 알다가도 모를 ‘Singular한 존재’라니, 꼭 이렇게 써야 하나. 정말 이런 식의 글이 싫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류의 글이 미술계에 허다하다는 사실. 개념으로 떡칠을 하여, 언뜻 그럴 듯한 수사적 효과는 가득한데, 속 알맹이는 맹맹한 잡소리들. 냉소와 재치와 무정이 가득한 분석철학 선생 밑에서 배웠더니, 얼치기 철학하는 글을 볼 때마다 가득 차오는 욕지기를 참을 수 없게 됐다. 이렇게 써놓고서, “그저 또 다른 존재들이 이들의 작업 언어를 통해 바깥에서 또 다른 바깥을 향해 말을 건네는 단독자들간의 대화를 목격함으로서 , 보다 깊이 있는 만남의 가능성, 그 의미와 조우하기를 기대해본다”고 써놓고 있다. 자기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것일까. 전시는 보지 못해서 할 말이 없지만, 볼 맘이 싹 사라진다. 정말이지, 공부하려면 똑바로 하자, 글을 쓰려면 제대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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