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ll_01>_35x25cm_2007
대도시의 전형적 개인성이 비롯되는 심리적 기초는 외적・내적 인상들의 신속하고 끊임없는 변천에서 유래하는 신경생활Nervenleben의 가속이다.(짐멜)매일같이 공사중인 ‘Hi Seoul’. 도심과 부심을 가릴 것 없이, 이곳저곳 구멍을 파고 건물을 지어 올리기 바쁘기 때문이다. 편안히 걷는 것은 고사하고, 발부리가 채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게다가 먼지 휘날리는 공기는 어떻하고, 덤으로 소음까지 선사하니, 한가로운 산보객은 죽을 맛이요,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 순간순간 그들을 위협하는 것들이 언제 어떻게 습격할지 아무도 모른다. 때문에, 마치 정글에 온 마냥, 두 눈 부릅뜨고, 양 귀 세워가며, 사주경계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여기서 정글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을 노리는 존재가 육식동물이 아니라, 각종 크고 작은 기계라는 것.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나, 인도까지 횡행하는 스쿠터 정도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것들처럼 일정한 형태를 띠는 것도 있지만, 소리나 영상이나 냄새처럼 감각을 매개로 하는 경우도 있다. 대도시를 둘러싼 감각의 풍경을 생각해 보라. 자연을 갈음해 들어선 새로운 감각들, 모든 감각이 인공으로 크게 부풀어 있다. 영상은 눈을 쪼고, 소리는 귀를 막고, 냄새는 코를 찌른다. 양의 측면에서, 강도가 수용의 폭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쯤 되면, 모든 것이 아프기만 하는 촉각의 경험으로 바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게다가, 거리를 10미터 걸어갈 때마다, 끊어지는 감각의 사슬들. 가령 발라드로 시작했다, 댄스음악으로 넘어가서, 힙합으로 정리되는 식이다. 영상과 냄새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질의 측면까지 불연속성이 발생하는 탓에, 주체가 온전히 정신을 챙기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해 신경의 경계경보를 울리다 보면, 항상적인 노이로제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생존의 길을 위해 감각을 제거하는 수밖에, 결국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현대인의 무표정한 얼굴은, 그들의 효율적인 몸놀림은 기계를 닮아있다. 현실과 주체가 서로를 반영하는 것이다.
<cell_03>_35x25cm_2007
나는 감히 내 의견을 조금 더 밀고 나아가 영감이란 ‘경련’과 어떤 관계가 있고, 모든 숭고한 사고는 뇌 속까지 울려 퍼지는 어느 정도 강한 신경의 충격을 동반한다고 단언한다.(보들레르)
보들레르가 마약에 탐닉하며 인공의 낙원을 꿈꾸었던 것은, 전조였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자연의 ‘정신적 감응’에서 인공의 ‘육체적 경련’으로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이 바뀌는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대로 대가가 뒤따른 결과였다. 여기서 심폐소생을 위해 가슴에 인공의 전기자극을 때리는 장면을 떠올린다면, 지나치게 상상하는 것일까. 그래서 핏줄을 대신해 회로가 작동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오늘날 과연 낯선 일일까. 저 옛날 방영된 육백만불의 사나이를 생각해 보라. 어쩌다 부상을 입었을 때 드러났던 속내 깊숙한 전기회로들, 살갗 내부에서 작동하던 인공의 보철물들, 전기자극은 어느새 그의 신경을 대체했다. 어쩌면 수많은 현대인은 이미 사이보그일지 모른다.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실현되지 못했을 뿐, 살갗 바깥부터 안쪽의 장기까지, 기계의 논리가 야금야금 관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극에 반응만 수행하느라, 사유능력이 퇴행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계가 육체에 침투해 들어온다는 것이다. 김정주의 작업은 바로 그것과 닮았는데, 흥미롭게도 그것의 모티브는 지하철의 노선도다.
<cell_03>_35x25cm_2007
벡의 지도[최초의 지하철노선도]는 테크놀로지의 요구조건에 맞춰 지리적 공간을 재구성했다. 이제 장소의 근접성은 지리학과 반대되는 것으로 타이포그래피의 차원에서 결정되었다…장소와 장소가 연결되는 대신에, 이제 점과 점이 연결됐다.(재닌 하드로)
언뜻 보기에, <Cell> 연작은 어느 기계장치의 정밀한 설계도 같다. 몇 개의 핵심모듈과 복잡한 회로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지하철의 흔적을 찾기란 난망해 보인다. 여기서 유념할 점은 지하세계라는 것이다. 지상과 달리 지하는 세계의 구축이 보이지 않는다. 감각을 파김치로 만들어 버리는 지상의 익숙한 공사중 세계와 달리, 지하의 구축은 인간에게 경험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새로움의 충격은 더욱 세질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라. 어느 날 갑자기 지하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신세계가 건설되어 있는 장면을. 지하의 공간은 지상보다 훨씬 극적인 것이다. 사회적 공간의 추상화, 그렇게 구축되는 격자형 지리들, 한마디로 인공의 논리는 동일할 뿐더러, 강도는 더욱 세진 것이다. 마치 무의식이 표현되지 못한 의식의 밑바닥인 것처럼, 지하세계는 지상이 감추어둔 속살인 셈이다. <Cell> 연작은 그러한 지리적 무의식을 들춰내는 것이 아닐까.
<cell_04>_35x25cm_2007
추상적 공간은 ‘상품들의 세계’와 그 ‘논리’, 그리고 그 범역적 전략을 담고 있으며, 자본, 커뮤니케이션, 교통의 흐름 속에서 확립된다.(르페브르)
게 다가, 그곳을 재현하는 지하철 노선도야말로 ‘차가운 추상’이다. 실재적 지리를 깨끗이 말소한 다이어그램은 3차원을 2차원으로 축소시켜, 평면성을 구축한다. 당연히 주체의 경험까지 탈바꿈된다. 볼거리가 제공되는 철도여행과 달리, 마치 컨베이어에 실려 가는 상품처럼, 지하철의 이동은 시각경험이 제거된 순수한 육체이동으로서, 이동경험과 시각경험을 체계적으로 불일치하게 만든다. 많은 이들이 볼거리 없는 지하철을 마다하고, 본능적으로 볼거리 많은 버스를 선호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즉 육체의 경험조차 2차원으로 환원되는 것(평면화), 즉 주체의 경험까지 구체성을 상실하고 추상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기계의 경험이다. 점점 육체를 지각할 기회를 빼앗긴 채로, 기계의 일부가 되어, 그것의 의지에 따라 이동하는 경험이다. 저 유명한 핑크플로이드의 <Wall>의 뮤직비디오가 보여줬던 묵시록은 현실인 것이다.
<중앙선데이> 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