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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2월 26일
![]() 이배경의 <City Man Wind II>가 새로운 주제를 다룬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부터, 대도시로 표상되는 새로운 현실은 수많은 사람의 영감을 좌우했다. “군중은 움직이는 장막이었다.”(벤야민) 거리를 가득 채운 군중의 무리는, 지금이야 일상이지만, 당시에는 매우 충격이었다. 말 그대로, 사람이 장막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 방식은 다르지만, 마네킹이 초현실주의의 토템이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간을 대신한 인형, 인간조차 죽은 것이 산 것을 갈음한 셈이다. 이배경은 그것을 잘라내고 붙여내고, 현실처럼 운동 또한 부여한다. 물론, '현실'의 일부를 자르고, 매체로 거르기 때문에, 당연히 똑같진 않다. 눈여겨 볼 점은 바로 이 지점, 이배경은 과연 어떤 방법을, 어떤 결과를 내고 있을까. 앞서 묘사했듯, 깊이 없는 평면의 2차원적 운동으로 변환되는 것이 첫 번째 실마리다. 이것은 그의 작업에서 여러 형태로 표현된다. <Insel>(2004)처럼 사람의 형상을 띨 때도, <Videokapelle>(2006)처럼 화면을 세로로 나눌 때도, 지금처럼 모자이크로 겹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뚜렷이 평면을 의식하며, 그곳에 관객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다만, ‘형상'의 모양은 다양한데, 이것이 ‘매체'의 속성을 의식한 결과인지, 분명치 않다. 소리는 두 번째 실마리로서, 관객을 ‘고립'시킬 때 핵심으로 작용한다. 알려졌다시피, 휴대용 디지털매체는 개인들의 상호주관적 세계경험을 1인칭의 매체경험으로 바꿔낸다. 특히, MP3 플레이어 같은 청각매체는 시각적 경험을 체계적으로 차단하여, 마치 편집이 시원찮은 뮤직비디오처럼, 공간과 시각의 거의 완벽한 불일치를 끌어낸다. 그때의 이질감이란 상당히 강력하다. 물론, 이배경의 작업이 그만큼의 효과를 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겨냥하여, 관객의 시공간 경험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만은, 겨냥한 것만은 확실하다. 결국, 이배경은 시각(공간)과 청각(시간)을 주체 안에 가둬두며, 상호작용을 활용하여 노렸던 결과이리라. 여기서 ‘가둬둔다’고 기술한 까닭이 중요하다. 흔히, 상호작용 작업은 관객의 참여를 끌어낸다고 간주된다. 멈춰서 수용만 하는 존재에서, 스스로 행동하는 존재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에코의 ‘열린 작품’과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단골메뉴로 인용하며) 관객의 자유를 보장하므로, 창조적 계기가 열린다고 자연스럽게 가정된다. 하지만, (자유로운) 상호작용은 (엄격한) ‘규칙’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런 규칙은 작가가, 특히 기술이 사전에 설정한 행동의 집합이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저렇게 하면 이렇게, 반응하라는 것. “상호작용의 선결조건으로서, 규정된 행동모형은 물론이요, 소통의 기술 및 기호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존재한다.”(딘클라) 그렇기에, 규칙을 은폐하는 상호작용은 신화에 불과하다. 당연히, 소통의 내용도 형식도 ‘기술의 매개’로 인하여 미묘하게 변질된다. 이배경의 작업에서 인간은 납작한 평면의 존재요, 무엇인가 잘려나간 존재요, 서로 겹쳐 있는 존재다. 어느 것 하나, 오롯이 존재하지 못한다. 총체는 고사하고 부분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저 겹겹이 모자이크의 일부로서 ‘기능’할 뿐인 탓이다. 그런데도 낯설지가 않다. 그런 식의 ‘형상화’가, 그런 식의 소통이, 이제는 익숙한 것이다. 과연 매체가 감각과 자유의 확장일지, 기술의 논리를 세심하게 따져야 하겠다. <아트인컬쳐> 2월호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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