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문맹은 카메라와 펜을 사용하지 못하는 자일 것이다.(모호이-너지)과연 현대의 문명은 카메라로 구축됐다. 4천만이 사진가인 시대요, 모든 정보가 영상으로 저장되는 시대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한손에 카메라를 들고서 세상을 낱낱이 잘라내서 뱉어댄다. 옛날처럼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인가 특별히 기념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찍고 본다. 정말이지 자기 신체의 일부 같다. 여기에 컴퓨터까지 가세한다. 디지털기술은 카메라까지 침투해 들어와, 매체들 사이를 가로막는 벽까지 무너트린다. 이렇게 되자, 옛날처럼 매체가 달라질 때마다 발생하는 시간적・질료적 간격마저 급속히 와해된다. 찍고 보고 자르고 올리는 행위가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것이다. 현실과 동일한 속도로 양산되는 영상들. 이렇게 상상해 보라. 손끝이 까딱할 때마다, 영상의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어쩐지 주술처럼 들리겠지만, 원리는 몰라도 이용한다면, 마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결국 문맹과 문명은 한 끝 차이다.

따라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지,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흔히 말하는 대로, 인간의 감각은 확장된 것일까. 그렇게 보인다. 벤야민이 말했던 대로, ‘시각적 무의식’은 광활히 열렸다. 보이지 않던 것까지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대가도 따랐다. 억압된 것의 봉인이 풀리자, 숨기고 싶은 것마저 나온다. 수평으로 정확하게 긁어내고 수직으로 깊숙하게 자른 다음, 무한히 복제하고 양산한다. “대중이 사물을 재생산하여 모든 소여의 일회성을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사물을 공간적・인간적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오늘날 대중의 정말이지 열렬한 바람이다.”(벤야민) 바람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대중은 사물을 가까이 끌어오다 못해, 영상으로 자신만의 철옹성을 구축해서, 깊숙이 은거한다. 이 결과 세상과 사진의 전통적 관계는 와해된다. 신비할 것도 기념할 것도 없는 세상, 정보가 너무 많아서 없는 것만 못하는 상황. 칼리 아이든은 시대착오적 감행은 그래서 흥미로워 보인다. 그녀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대신에 ‘사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설명한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이었는지 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녀의 <광경>은 사진전이 아니라, 박물관처럼 보인다.

우선 <광경>의 전시를 낱낱이 분석해 보자. 사진이 있고 설치가 있다. 사진은 포토그램과 핀홀카메라로 제작됐고, 포토몽타주가 기법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사진에서 소재가 딱히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일상의 사물도 있고, 자신의 모습도 있는 등등, 대체로 특별할 것도 없는 것들이다. 여러 시기에 제작된 작품을 한꺼번에 전시한 탓도 있겠지만, 무엇을 찍었는지 보다 어떻게 찍었는지 중요해 보이는 까닭이다. 그것은 칼리 아이든이 카메라를 설치한 이유기도 하다. 중앙에는 중국집배달통을 이용해 만든 핀홀카메라 두 대가 맴돌며, 구석에는 3중 장막으로 밀폐된 ‘어두운 방’이 자리 잡고 있다. 관객은 두 가지 설치를 경험하고서야, 사진이 어떻게 찍혔는지 무릎을 친다. 전시장은 이 순간 작은 사진박물관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더욱 생각하게 된다. 사진은 무엇이고, 카메라는 무엇인가.

알려졌다시피 카메라로 벌였던 실험은 20세기 초반의 역사적 전위대의 전매특허였다. 만 레이와 모호이-너지는 포토그램을 통해서 새로운 매체의 잠재력을 시험하고, 시각의 표현력을 확장해 보고자 했다. “사진기구들은 우리의 광학도구들로서, 눈을 보완하고 심지어 완전하게 만들 수 있다.”(모호이-너지) 하지만 거의 백년을 훌쩍 넘은 지금, 그 같은 매체실험은 실효도 없고 의미도 없다. 칼리 아이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역사적 후위를 자처하며, 카메라의 시원으로 돌아간다. 카메라 옵스큐라, 카메라의 원형. 그녀는 이 장치를 크게 확대하여, 관객이 들어가 보게 하였다. 관객은 그곳에서 작은 구멍에 비친 이미지를 실제로 만진다. 여기서 ‘빛그림photo-graphy’은 현실의 완벽한 일부요 흔적이 된다. ‘지표’라는 것이다. 작가도 없고 약호도 없지만, 우연과 인과로 구성되는 자연의 흔적들. 카메라 없이 감광재료에 흔적을 남기는 포토그램은 이러한 측면을 더욱 확증한다. 게다가 그녀가 돌아간 것은 장치만이 아니다. 당연히 작업방식도 기계 없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마치 솜씨 좋은 사진장인을 지향하는 것 같다. ‘작가’는 없는데 말이다.

오늘날 사진은 이런저런 이유로 위기를 맞고 있다. 이제야 겨우 ‘예술’로서 인정받는가 싶더니만, 다시 ‘기술’ 때문에 작가의 솜씨조차 보충되고 대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돌파구를 마련한다. 사진을 조작하거나, 추상하거나, 심지어 설치한다. ‘나 홀로’ 미술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 작가와 대중의 간격을 미술의 방법으로 떼어놓는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돌고 도는 것이다. 미술을 압박하며, 시각의 신천지를 개척했던 사진은, 이 와중에 본래의 기능마저 의심을 받기에 이른다. 물론, 사진이 무엇이었고, 무엇이며, 무엇일지, 반성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특히 지금처럼 온갖 매체가 현실을 두텁게 감싸는 바람에, 두 짝패의 관계가 어그러진 상황에서는. 하지만 그녀의 반성이 뒤로 가는 징후인지, 앞으로 가는 노력일지 불확실하다. 그녀의 영상에 비친 현실은 실낱같이 희미하고, 영상에서만 좌표를 찾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회화가 지긋지긋하게 보여준 바다.
<포토넷> 8월호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