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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02일
![]() 1. 최근 회화가 강세다. 지난 백년간을 돌아보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회화는 꾸준히 죽어갔기 때문이다. 시각예술의 제왕으로서 누렸던 오랫동안 권좌는 간데없이 사라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진 같은 경쟁 장르가 치고 올라오기도 했고, 전위대가 낡은 매체로 비판하기도 했고, 회화만의 표현력이 고갈되기도 했다. 때때로 힘을 축적해 반격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회화는 완연한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화판은 배설의 공간으로 타락했다. 그랬던 터라, 회화는 오늘날 감개가 무량할지 모르겠다. 잘 팔리고 인기도 끌고 있으니, 금상첨화다. 역설처럼 들리겠지만, 회화는 심각하게 ‘소외’되어 있다. 마치 중병의 환자에게 모르핀을 투여해 잠깐 동안 의식만 반짝인다고 할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회화가 복권된 것은, 자본을 등에 업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전세계 미술판도를 생각해 보라. 오랫동안 예술경향을 주도했던 비엔날레는 영향력을 급격히 상실한 반면에, 경매를 비롯한 아트페어는 거침없이 영역을 넓혔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신규 자본들이 속속들이 미술판에 진출하여,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켰다. 물론 순기능도 있었다. 전근대적 미술시장을 일신할 계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과 예술의 거리는 너무나 빨리 좁혀졌다. 이 결과 자본이 기존의 제도를 건너뛰고 ‘직접’ 예술가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악몽이다. 완충지대 없이 작가의 정신을 식민화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신진작가는 존재의 기반이 취약한 탓에, 외부의 손길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현재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평면의 갈래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포토샵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 되기도 하고, 하이퍼리얼리즘작업을 하며 ‘사진기’가 되기도 하고, 각종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차용하는 ‘매개자’가 되기도 한다. 각자 선택한 양식을 갖고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성찰’하지 않은 채, 스스로 기계처럼 도구가 되어 반복해 찍어대는 모습은 ‘사물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 하다. “문화와 문명(즉 자본주의와 사물화)이 인간을 사로잡아감에 따라서 인간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인간이기를 중단한다는 것이다.”(루카치) 흥미롭게 김남희는 반대로 간다. 이 부박한 갈래길를 마다하고, 오래된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 우선 김남희의 첫 번째 전시 <위로의 순간>(2007)부터 살펴보자. 여기서 그녀는 자신이 짧게 겪었던 기억을‘집으로’ 투영했다. 집은 이른바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는 모태다. 때문에 그곳에는 인간의 기억이 사물의 형태로 자연스럽게녹아있다. 책상에도 침대에도 저 멀리 뒹구는 신발 한 짝에도 저마다 고유한 기억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기억의 단편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것이다. 사회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내면’이라고 하면 정확할까. <위로의 순간>에서 그녀는 그렇게집을 무대로 삼아 자신과 주변사람의 기억을 소소한 드라마를 엮어냈다. 그녀는 사물처럼 외부에 그대로 반응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대신에 무엇이 되었든 실마리를 잡아서, 속에다 쟁여두고 일정한 형태를 부여하려 애쓴다. 감각에만 머물지 않고 온전히 내면을응시하는 전통을 따르는 셈이다. 이것은 초기의 작품을 보면 훨씬 확연하게 드러난다. 2006년에 제작된 <심장을 버리고 살수 있을까?>와 <심장의 소리를 따라가다>를 보면, 여느 소녀가 겪었을 법한 연약한 상처가 ‘소박하고도직접적으로’ 나타났다. 그랬던 것이 나중에 타인의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하는 단계로 확장된다. 자신이 겪었던 상처를 타인과공유하는 기억으로 만든다고 할까. 그녀는 그렇게 ‘밖으로’ 한발 한발 걸어간다. 이러한 벡터는 2008년 <기억을 위한회화>에서 더욱 강력해진다. 우선 집의 기능이 달라졌다. 이전까지 집은 그녀의 세계이자 무대였다. 모든 것이 집을 중심으로회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극적으로 작아진다. 아예 ‘집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일까. 형태도 다른 사물과 다를 바 없어지고,비중도 여러 가지 소재 가운데 하나로 축소된다. 대신에 다채로운 색면이 화면을 꽉 채운다. <파도 속의 꿈>이대표적이다. 여기에는 이전 작업처럼 집도 있고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맥락이 달라진 만큼 전과 같을 수가 없다. 전에는 집이라는구체적 대상을 매개로 하였기 때문에, 왜곡된 형태로나마 ‘외적인 세계’가 표현됐지만, 이제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없다.있다면 색면인데, 색면은 대상의 대상성을 약화시키지 강화시키진 않는다. 게다가 그녀의 색면은 숨죽여 있지 않고 극적으로 약동하는탓에 화면의 구도까지 비틀어 버린다. 그런 곳에서 대상들은 이리저리 휘말릴 수밖에 없다. 집들은 납작해져 가라앉았고, 사람들은작아져 부유하는 것이다. 옛날에 보였던 집과 사람의 관계는 약해지다 못해 아무 관계없어 보일 정도다. 그전까지 집에 내면에속박된 끈을 끊어버린 것일까. 이제 중심은 대상에서 색면으로 전환되고, 벡터는 다시 ‘안으로’ 향한다. 물론 옛날과 똑같진않겠지만 말이다. ![]() 이렇게 내부와 외부가 뒤섞이면, 대체로 초현실적인 세계가 구축되어, 무엇인가 긴장되기 마련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기 때문이다. 김남희의 화면에서도 그 같은 갈등이 없다고 하기는 힘들다. ‘감정-내면-색면’과 ‘대상-외부-묘사’의 짝패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날카롭지 않고, 고분고분다. 그 이유는 내면에서 현실을 꿈처럼 ‘소박하게’ 화해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 환상이다. 이 결과 첫 번째 전시 때 보였을 내용적 긴장은 형식적 긴장으로 완연히 전화된다. 이것이 그녀가 가다듬는 언어(기법)의 문제인지, 응시하는 대상(세계)의 문제인지, 아직 분명치 않다. 어쩌면 과정에서 두 가지 가 뒤섞이며 진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의 작업이 ‘일기’로 끝나지 않으려면, 바깥의 인식을 저버려선 안 된다. “사체로부턴 유물이 나오며, 경험이나 미화된 그 죽어버린 과거의 사건들로부터는 추억이 나오는 것이다.”(벤야민) 물론 저 옛날 꿈꿨던 주체와 현실의 화해는 오늘날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냉혹한 현실을, 부박한 미술판을, 냉정히 응시할 시선을 가슴과 화폭에 쟁여둬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림에서라도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꿈꿀 수 있으리라. <갤러리 차> 2008년 11월 12일 ~ 2008년 1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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