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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5일
![]() 원래 사진은 ‘찍는’ 것이었다. 사물을 앞에 두고, 사진기를 설치한 다음에, 인간이 끝맺는다. ‘사물-도구-인간’의 삼각구도가 이뤄진다. 주의할 것은 ‘끝맺음’의 의미다. 구도만 보면 전통의 회화와 다를 것이 없지만, 무엇인가 뒤틀리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도구-인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엄격히 말해서 사진에서 주체는 막바지 과정을 끝내는 정도지, 회화처럼 전체구조와 전체과정을 총괄하지 못한다. 주체로서는 손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손길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도구의 감가상각이 대신에 강화된다.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 결과, 세계와 예술의 관계는 파도가 해변에 남겨둔 흔적과 같아진다. ‘지표’가 ‘재현’을 갈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찍는’ 것도 아니게 되었다. ‘디지털기술’이 등장하여, ‘사물’의 존재까지 흔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옛날에도 보정과 편집은 있었고, 세트를 설치해 연출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사물-도구’의 지시성 만큼은 온전히 존재했다. 수정되고 연출돼도 무엇인가 ‘앞에 있었던 것’이다. 디지털은 이 관계를 꼬았으며, 사물의 흔적을 착실하게 제거해 갔다. 지표마저 소멸되는 것이다. 삼각구도는 또 다시 헝클어지며, 도구를 축으로 재편된다. 이제 사진은 ‘만드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러자, 사진의 ‘시제’도 달라진다. 사진은 이제껏 ‘과거’였다. 있는 것을 나중에 따라 잡는 것, 즉 모방Nach-Bildung이기 때문이다. 저 옛날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것은 그래서 당연했다. “회화와 조각의 기원에는 미라 콤플렉스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었을 것이다.”(바쟁) 하지만 만드는 사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과거와 현재에 없는 것, 즉 모형Vor-Bild에 가깝다. 관계는 역전된다. 현실이 사진을 쫓아간다. 사진에 나타난 ‘징후’는 강력했다. 이제 사진은 사진가의 전유물일 수 없게 되며, 장르에 상관없이 사진으로 작업할 근거가 마련된다. 여러 조각가들이 사진으로 작업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김영균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새롭게 변모한 ‘무기’를 갖고서 어떠한 ‘미래’를 보여주는가. ![]() 김영균의 디지털작업은 몇 가지 소재로 이뤄진다. 신화, 육체변형, 나르시시즘, 방독면. ‘평범남 K씨’는 이렇게 고백한다. 현대사회는 개인을 억압하고, 억압된 개인은 가면을 쓰고서 방어할 수밖에 없고, 신화와 종교는 일종의 돌파구를 터주며, 방독면을 쓰고서 상상적으로 신이 된다고. 먼저, 신화와 종교에서 비롯된 형상들은 손쉽게 관찰된다. 만다라 같은 도형들도 엿보이고, 아누비스, 반인반마 켄타우로스, 부처, 그 외 정체가 모호한 괴수도 등장하며, 어느 신화적 장면에서 빌어 왔을 우의 같은 장면도 존재한다. 육체의 변형은 훨씬 극적이다. 타인을 불러들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바꿔서, 신화적인 존재를 창조했다. 나르시시즘이야 명백하게 나타나므로,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마지막 방독면이 생뚱맞아 보이긴 하나, 원래 ‘가면’이 ‘내가 아닌 존재’가 되는 장치로 기능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은 없다. 물론 ‘방독면’을 선택한 이유는 생각해 볼만하다. 지적대로 가면은 다른 존재가 되는 상징이자 방법이다. 따라서 가면이 상징하는 무엇은 대부분 초월적 존재다. 정령의 사회라면 곰이나 호랑이고, 신들의 사회라면 지혜나 용기며, 신의 사회라면 유일자와 소통하는 영매의 기능이다. 그러면 방독면은 무엇일까. 적어도 군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마리는 그의 고백에 나와 있다. 평범남 K씨는 자신을 감추는 것이 먼저였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신의 존재는 비극적인 시대착오다. 실제로 신이 세상에 강림하면, 비극만이 난무할 뿐이다. 전체주의사회의 우상숭배를 생각해 보라. 신을 대리한 존재는 기껏해야 영화에나 등장하는 반쪽짜리 영웅들 정도며, 그것의 후광을 입은 인기배우 외에는 찾기 어렵다. 결국, K씨의 경우 결과는 비슷할지 모르나, 영매의 가면과는 출발점이 판이한 것이다. 권능과 비슷한 것이 있다면, 방독면의 시각적 ‘낯설음’ 정도다. 어쩐지 괴물처럼 보이는 형상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요괴라고 불리는 것들은 자기 정체성이 위기에 처할 때 나타난다. 그것은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지우고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지운다.”(김현) 있을 곳에 없고, 없을 곳에 있는 것, 그의 말대로 사회에 맞설 ‘무장’이 마련된 것일까. 하지만 이것도 사람에게 ‘보여야’ 가능하다. 건널목 중간에 혼자서 외로이 서있는 존재를 보라(<강남역의 익숙하지 않은 사람> 2006). 공격은커녕 수비마저 위태로워 보인다. 방독면은 무기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방독면은 일관되게 사용되지도 않았다. 무기로서 그다지 효과가 없고, 항시 착용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방어적 태도는 사실 내용과도 일치한다. 소재들 모두가 ‘과거’의 것이요, 나르시시즘도 안으로 여미는 형태며, 신조차 형태만 보이지 권능은 찾아보기 힘들다. 요컨대 평범남 K씨는 공격수가 아니라 수비수인 것이다. 그가 신이라면, 박제된 신이나 다를 것이 없다. 제법 탄탄해 보였던 작가의 서사는 균열이 적지 않다. ![]() 사실, 신의 ‘존재’는 작업내용보다 작업방식에서 뚜렷하다. 앞서 지적된 소재의 의미를 벗겨내고, 이미지 그대로 응시해 보자. 남는 것은 기하학적 형상들이 화려하게 역동하는 모습들 뿐이다. 팔을 몇 개로 늘려 반복하고, 장면을 잘라서 이중 삼중 반영하고, 형태까지 왜곡해서 동적인 효과를 구축한다. 우의처럼 연출한 장면도 그렇다(<피에타> 2008).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지금이 신고전주의가 위세를 떨치던 시대도 아닌데 말이다. 있다면 형식적인 대립밖에 없을 것이다. 신화적 상징, 우의적 장면, 기타 등등, 소재적 일치가 약하다면, 결국 남는 것은 시각성이다. 소재보다 형식이 우위에 서는 것이다. 여기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사진이 구성되는 것으로 변했으며, 삼각구도가 도구를 축으로 재편된다고 지적했다. 그때 언급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작가의 지위. 작가에게 떨어진 것은 무엇일까. 얼핏 보면, 작가는 특히 조각가는 신천지를 만난 것처럼 보인다. 기계눈(카메라)과 전자손(포토샵)으로 형태를 구축하니까 말이다. 눈으로 만지고 만드는 것이다. 눈 하나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세상을 만드는 ‘조물주’가 딱 맞는 것 같다. 물론 기술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가가 따르기 마련. 두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조물주-조각가가 다스리는 세계는 줄어들며 평평하게 눌려버린다. 원래는 공간과 사물을 창조하던 것을 생각하면, 완연한 쇠락이 아닐까. “근대의 가장 기초적 과정은 세계를 이미지로 점령하는 것이다.”(하이데거) 둘째 주체는 어떤가. 기술을 매개로 쏟아져 나오는 온갖 정보와 기호 때문에, 사유할 틈은 고사하고 감전되기에 바쁘다. 사유의 깊이는 일치감치 포기한 채, 감각의 파도에 허우적대거나, 아니면 기술과 그것의 은총에 홀딱 넘어가든가, 둘 중 하나다. 평범남 K씨는 과연 어느 경우일까. ![]() 4. 기술을 통해서 사진은 시제를 단숨에 당겼고, 오히려 현실보다 앞서서 손짓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변과 차변을 제하고서 얻은 미래는 과거의 흔적 때문에, 기술의 매혹된 탓에, 불투명해 보인다. 그는 이 점을 과연 의식하고 있을까. “20%의 나르시시즘과 30%의 신과 신화에 대한 동경, 50%의 디지털중독증.” 이것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 어떤 힘이 지배적인가,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SeMA 신진작가 워크샵> 서울시립미술관 12월 16일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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