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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1월 23일
![]() 1. 기억이란 신기한 것이다. 그것은 우선 의식과 구별된다. 의식은 현재 경험된 것이자, 감각 이상의 것이자, 한번 걸러낸 것이다. 인간은 감각된 모든 것을 짊어지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마치 원자로가 폭발하듯 정신이 붕괴되어 버린다. 괴로웠던 즐거웠던 모든 경험을 ‘현재’까지 같은 강도로 느낀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은 살아 있는 지옥이다. 기억은 오히려 무의식과 유사하다. 무의식은 말 그대로 의식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험된 모든 것이 의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라지는 것도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켜켜이 쌓이고 쌓여서 정신의 어딘가에 숨죽이고, 언젠가 깨어날 채비를 한다. 문제는 그것이 주체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이다. ‘내’가 꺼내고 싶을 때 꺼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바다 밑에 잠긴 빙산 같아서, 보이진 않지만 의식된 것을 떠받치며 조종한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이 모든 것을 성에너지 리비도로 환원하여 설명하며, 일종의 인류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만, 그것만이 설명하는 방법은 아니다. 인류학을 벗어나 인식론적 차원으로 확대하면, 훨씬 흥미로워진다. 바로 프루스트적인 ‘무의지적 기억’을 만나기 때문이다. ![]() 프루스트는 의지적 기억이 지나간 일들을 말해주지만 과거의 흔적을 보관하지 않는다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흘러간 과거는 ‘이지의영역이나 그 이지의 영향권을 벗어나 어떤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 속’에 존재한다. 누구든 집요하게 생각나지 않는 기억이 있을것이다. 어렸을 적 기억일 수도, 어떤 사람일 수도, 어떤 장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음악을 듣든지, 사진을 정리하든지, 일기를들춰보든지 등등, 우연한 기회로 기억은 활짝 열리며, 시제는 과거로 돌아간다. 사건이나 물건 하나 때문에 말이다. 기억은 정신에있는 것이 아니다. 몸 안에, 몸과 접속된 물건에 새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상을 접촉할 수 있을지, 완전히 우연이다. 결국기억은 의식의 음화netatives요, 몸은 기억의 담지자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 진단만은 아니다. 오늘날 인간의정신은 기억과 의식으로 완전히 분열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항구적인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 과거와 현재에, 기억과의식에, 한 쪽 발을 걸친 채로 말이다. 신하정의 작업이 그렇다. 거기서 그녀는 자신의 고향을 담고자 한다. 그녀가 겪었던태백을, 검은산을 스스로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녀의 현재가 은밀히 담기며, 그녀의 과거를 교란한다. ![]() 신하정의 <검은 산>(2009)은 작년에 했던 <태백>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고향태백을 응시한다. 태백의 과거풍경과 아이들의 모습이 여지 없이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태백은 탄광지대로 유명한 곳이다. 한때는한국의 근대화를 자랑하는 상징으로 묘사됐고, 한때는 사북항쟁의 모습으로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를 기록했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찾기 어려워졌고, 오히려 강원랜드 카지노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산업과 항쟁의 현장에서 카지노도박장으로 변모한 모습이라니, 너무나 극적이다. 어쩌면, 이 기묘한 결합만큼 한국의 현대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은 없는 것같기도 하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그곳을 방문했고, 사진으로 평면으로 실감나게 담아냈다. 그런데 신하정은 무엇인가 석연치 않았던것일까. 기존에 태백을 보던 방식과 달리 접근한다. 그녀의 작업을 찬찬히 살펴보라. 탄광지대를 묘사했지만, 비판적인 시선은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 계곡을 봐도 그렇고, 나무를 봐도 그렇다. 검게 물든것만 제거하면. 그곳에 등장하는 인물도 그 점을 강화한다. 웅크리고 있거나, 뛰고 있거나, 서성이는 그들은, 대부분 벌거벗은아이의 모습이다. 아이들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동화의 세계다. 무엇인가 생략되고 무엇인가 강조되는 탓에, 세상을 실상 그대로 담지못한다. 결국 어렸을 적 눈에 비친 풍경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녀는 고착된 것이다. 자신과 태백의 과거에(이렇게 말한다고해서, 신하정의 작업을 비판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에도 그때의 현실을 애써 기억하는 태도며, 그것이 개인의작업과 방식에 어떻게 투영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 어쩌면 질료가 그녀의 세계를 보완할 지도 모르겠다. 알다시피 그녀는 탄을 직접 갈아서 검정색으로 활용한다. 이 때문에 자세히 보면 여느 검정색과 다른 질감이 형성된다. 게다가 비단천에 채색을 하므로, 여느 물감과 다르게 응겨붙는 형태를 보여준다. 태백의 풍경, 석탄의 질료. 의미로 본다면야 너무나 명확한 짝패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 질료가 생각만큼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 세 겹으로 덧대서 형성되는 환영 속에서 어디론가 흩어져 버린다. 여간해서 눈치채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어릴 적 기억만큼이나, 석탄이란 질료는 오늘날 너무 먼 당신처럼 느껴진다. 그러면 그림에 담긴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태백을 냉정히 그렸던 선배작가와 구별되고 싶다고 말한다. 바람은 실현됐을 것이다. 그녀가 말했던 대로, 외부에서 태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응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까지 내부에 갇힌 것은 아닐까. 그래서 구체적인 ‘태백-현실’은 사라지고, 간직하고픈 추상적인 ‘태백-기억’만이 남은 것은 아닐까. 흥미로운 것은 오히려 <기억의 단상>과 <태백에 서다>에 나타난 형광빛 가득한 조명장치였다. 거기서 검정색 석탄은 어느 곳보다 희미하게 나타나며, 조명장치는 누르스름한 비단천과 강렬하게 대조된다. 마치 과거와 현재처럼 말이다. ![]() 예술가는 ‘기억을 의식해’ 표현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존재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자신을 속일 가능성이, 자신이 속아넘어갈 공산이 크다. 그것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냉철히 응시할 대상은 현실만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도 마찬가지다. 물론 몸에 새겨진 오래된 습관처럼, 태도가 단숨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림은 조금씩 ‘넌지시’ 말하고 있지 않았을까. <북촌 갤러리> 1월 14일 ~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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