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종과 변정현의 전시는 2인전의 형태지만, 실상은 독립된 전시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우선 각자 설정한 주제가 다르다. 이순종은 기존의 미인도 연작과 정체성 문제를 짚는 작품을 선보인다. 특히 생물학적 성정체성의 교란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하기야 성을 전환한 남성이 임신한 장면은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리라. 반면에 변정현은 ‘자신’의 문제를 주제로 삼는다. 나는 누구이며, 세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불화하는가. 결국 세상에 질 수밖에 없는 여느 주체의 소회를 설치와 평면에 담았다. 넉넉히 생각해서, 둘 다 정체성의 문제를 작업으로 삼았다고 볼만도 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공룡과 낙엽이 맺는 관계와 비슷하다. 비슷한 점을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연출의 측면은 어떨까. 벨벳갤러리는 지하와 1층으로 되어 있다. 지하에는 이순종이 1층에는 변정현이 자리를 잡았다. 이순종의 경우는 지적대로 성정체성에 관련된 작업이 주를 이룬다. <E>와 <E좌E우>는 인간형상을 꺼멓게 왜곡시켜 표현한다. 옆에 있는 화려한 미인도가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그는 언어놀이를 하여, 의미를 보충하고 고정한다. ‘E’에서 ‘He’가, 거기서 ‘She’가 나온다고, 그래서 ‘E’는 존재의 근원이라고. 그의 말대로 임신남이 성의 완성형일지 알 수는 없으나, 그림만 보면 미래가 밝아 보이진 않는다. 어두운 것은 연출도 비슷하다. 예전의 미인도 연작이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흐트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업의 질에 대한 판단은 아니다. 다만 전시의 밀도가 어쩔 수 없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변정현의 경우는 다른 측면에서 공명을 가로 막는다. 그녀의 전시는 자기 완결적이다. 자신의 이야기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내가 누구인지 묻는 상황에서, 타인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겠는지. 공간에 설치된 면면을 살펴봐도 그렇다. 테이프로 짜맞춘 몸뚱이는 옷걸이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모두가 속이 텅 빈 것들이지만, 역설적으로 공간을 가득히 채운다. 옆에는 조각난 사진들이 마치 벽처럼 막아 서지만, 그것 또한 가벼운 것들이고 부유하기는 마찬가지다. 저 멀리 장지에 희미하게 비치는 ‘작가’는 사진의 음화처럼 이곳에서조차 낯선 타인처럼 보인다. 대화는 고사하고 타인의 존재자체가 거부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고정된 것은 자아가 아니라 이미지라는 것을. “왜냐하면 무겁고 부동하며 집요한 것은 이미지이고, 가볍고 분열되어 있으며 분산된 것은 ‘자아’이기 때문이다.”(바르트) 이 때문에 사회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아를 포획하며, 자아는 영구히 신경증에 시달린다.
2인전도 엄밀히 보면 기획전이다. 일종의 ‘관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 때문에 개념에 따른 연출이 필수다. 여기에는 그런 것이 미약해 보인다. 그저 동시에 전시 두 개가 붙어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지하와 1층이 단절된 탓에 서로 공명할 여지가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또한 연출을 한다고 작품을 언제나 섞어 놓으란 법도 없고.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대화’는 있어야 한다. 조곤조곤 서로의 빈곳을 보충하는 방식도 있을 테고, 서로와 날캅롭게 대립하는 방식도 있을 테고, 기타 등등 많을 것이다. 그런 게 없다면, 전시를 보는 것도 쓰는 것도 매우 난감해지기 마련이다. ‘무엇에 대해서’ 써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기껏해야 위에서 했던 것처럼 하나씩 설명하며 늘어놓는 수밖에 없다. 작품과 무관하게 못내 아쉬운 점이다.
<벨벳갤러리>, <아트인컬쳐>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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