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리영희)<춤추는 무뢰한>은 속내가 뚜렷한 전시다. 좌파와 우파의 시각을 대조해 보는 것. 노순택은 오마이뉴스 기자를 거쳤던 기록사진 작가고, 채승우는 현직 조선일보 기자니까, 한국에서 이만한 이념의 짝패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어쨌든’ 카메라는 진실을 전달하는 기계가 아니던가. 기계 위에 쌓는 진실의 탑들이 어떻게 다를지, 상상만 해도 궁금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고, 계속 갸웃거리는 고개를 가누지 못했다. 물론, 공간에 늘어선 이미지들은 각기 열심히 말을 걸었다. 자기가 누구고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소곤거렸다. 그러나 들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가 들릴 만 하면 다른 소리가 훼방을 놓기가 일쑤였다. 토론하고 대화하는 식으로 주고 받는 방식이었다면 그나마 좋았으련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치 만원버스에서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서 떠드는 식이었다. 그러니 시끄럽기만 할 수밖에.
처음에는 기술적인 문제로 생각했다. 이념을 앞세워 기계적으로 결합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진은 일종의 파편일 뿐이기에, 그 도덕적・정서적 중요성은 사진이 어디에 삽입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즉 사진은 어떤 맥락에서 보이는가에 따라 변한다.”(손탁) 판이 없으면 조각난 퍼즐은 의미가 없다. 접점을 명확히 설정하지 않고서, 이미지를 늘어 놓은 결과로 보였다. 현장은 마치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과 같았다. 기획자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진의 물리적 프레임을 달리 하여 작가를 구별해 놓았고, 서로의 작업을 규칙적으로 대조시켜 전시동선의 불연속성을 연출했다. 하지만 역부족처럼 보였다. 앞서 지적대로 서로에게 하는 대화가 아니라, 혼자서 하는 독백이었기 때문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지만, 이렇게 날았다가는 추락하는 것도 모자라 날개까지 찢겨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그들은 같은 곳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사진작가의 투시력은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존재하는 데 있다.”(바르트)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따라 붙은 현전의 흔적이란 물리적인 것만은 아니리라. 각기 서 있는 자들의 관념에도 태도에도 깊이 새겨져, 그들 사이를 크게 갈라 놓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멀찍이 떨어진 이미지들은 한없이 평화롭고 한가해 보이기 시작했다. 현실의 조각들은 그렇게 ‘가상’에서 하릴없이 화해하는 것일까. 대조되는 것은 오히려 웅성거리는 전시장이었다. 누구의 귀띔대로, 같은 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이란, 불온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지는 공평해. 무엇에 대해선지,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참을 수 없는 무엇인가 올라왔다. 여기서 기획자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노순택의 진정성을, 채승우의 태도를 의심하는 것도 더더군다나 아니다. 차라리 그랬으면 다행일 것을. 한낱 이미지일 뿐이구나, 하는 무력감이다. 그것에 대한 이 글도 마찬가지로, 한낱 글줄일 뿐이구나, 하는 무력감이다. “사진은 사람들이 자유를 만끽하는 사회에서 정치권력과는 무관하게 현실 그대로의 삶과 사건을 보여준다.”(헬무트 게른스하임) 한 때는, 믿었다. 카메라로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그래서 인식의 무지와 맹목을 씻어내고, 사회의 억압과 굴곡을 깨칠 수 있다고. 무엇보다 진실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를 일 투성이다. 진실도 현실도 사진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을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기는 것이다. 아니 잊지 않기 위해서. 패배하더라도 그것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리라.
<아트인컬처>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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