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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 23일
![]() <The Medium>은 세 가지 문제를 던진다. 첫 번째 매체예술의 현재. 기획자의 말대로 좋았던 시절은 지나갔다. 매체예술의 기지였던 ZKM도 엔진이었던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도 예년의 모습을 잃은지 오래다. 그곳들은 규모를 줄이거나 성격을 바꾸었다. 여러 가지 말들이 오고 갔으나, 공격적 행보로 보기는 어려웠다. 방어에 급급했던 것이다. 문제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물론 반대의 측면도 있다. 매체예술의 활력은 분명히 줄었다. 하지만 현실에 활용되는 양상은 늘어났다. 이른바 장식경향이다. 이것은 매체예술만 해당되는 현상은 아니다. 미술판 전체가 자체의 활력을 잃은 채, 자본에 놀아나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탓이다. 두 번째 한국의 매체예술.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새로운 현상에 재빨리 반응은 했지만, 제도로 만들지 못했다고 할까. 게다가 매체예술은 본성상 장인모형이 적합지 않다. 오히려 영화처럼 합리적인 공장모형이 필요하다. 한국은 여기서 짜임새 있게 규모를 키우지 못했고, 전통적 장인모형을 고스란히 답습했다. 당연히 작업의 다양성도 제한됐고, 심하게 말해서 화판을 확장한 경향도 짙었다. 기지를 만들지 못하고 유행처럼 흘러갔으니, 후속세대가 단절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창 매체예술을 생산했던 작가들은 그렇게 섬처럼 고립되어 갔다. 매체예술은 너무 빨리 늙어버린 것일까. 매체예술의 잠재력도 소진된 것처럼 보이고, 매체예술이 둥지를 틀만한 자리도 부족하며, 매체예술을 생산하는 단위도 약화되는 상황. 고민이 클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기획자는 여기서 매체의 본성을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에 세 번째 문제다. 매체란 본시 무엇과 무엇을 매개하는 것. 내면에 매몰된 경향을 넌지시 비판하며, 사회와 예술을 매개하는 것으로 좁혀서 접근한다. 그래서 제목도 ‘매체’다. 이 점은 작가의 면면을 봐도 확증된다. 김태은, 류호열, 목진요, 뮌, 박준범. 그들은 우선 형식과 내면에 함몰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바깥을 당겨오는 작가들이다. 그것이 내용상 사회든 일상이든, 형식상 싱글채널이든 가변형 장치든, 자유롭게 표현된다. 그러니 전시는 마치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이 펼쳐질 수밖에. 하지만 그 빛깔은 날카롭지 않고 힘겨워 보였다. 마치 후일담 소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니면 일종의 생존확인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것은 상당부분 어쩔 수 없는 일, 작가의 문제도 기획자의 문제도 아니다. 가파르게 변해가는 매체의 변화가 그 속도가 무정할 뿐으로, 애초부터 개인 혼자서 짊어질 짐이 아닐 것이다. <The Medium>은 바로 그 점을, 방어적으로 보여주는 전시이리라. <퍼블릭아트> 10월 이글루스 가든 - 미술을 보고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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