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확실히 옛 어르신들의 말씀은 틀린 말이 없다. 문화예술의 위계에서 미관말석을 겨우 차지하고 있는 만화에, 탕아요 지진아요 불행아인 이 만화에, 제법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미술 속의 만화, 만화 속의 미술”이라니! 오호라, 정말이지 오래 오래 살아 두고 두고 경청할 일이다. 만화에 햇살이라니, 생각할수록 감회가 새롭다. 청소년보호법의 매서운 칼날이, 가혹한 검열의 칼바람이 휘날릴 때를 생각해 보라. 따뜻한 햇살은커녕, 뜨거운 불바다만이 만화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는가. (히틀러나 했던 짓을 버젓이 해놓고, 엄숙한 퍼포먼스를 하는 양, 폼 잡는 꼴은 정말이지 구역질난다) 모난 놈이 정 맞고, 약한 놈이 동네북이 되듯이, 만화는 단죄받는 전범(戰犯)의 길을 꿋꿋이 걸어왔다. 그런데, 고고하기 짝이 없는 회화가 어찌 만화를, 아니 천하기 짝이 없는 만화가 감히 미술이라니!
물론 전시 한번 했다고, 이토록 호들갑을 떨만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50년 전의 팝 아트에서 만화를 끌어썼던 전례도 있고 하니, 또한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한국이란 ‘맥락’에서 요즘의 만화와 미술의 심상찮은 ‘동거’를 보면, 사뭇 흥미롭게 다가온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국 미술이 이제야 미국식 (혹은 식민적) 모더니즘(추상표현주의)의 ‘바깥’을 사유하려는 징후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한 리얼리즘과 다른 측면에서 (소비자본주의의 징후지만) 살아 숨쉬는 ‘현실’로 하강하는 모습으로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전시는 분명히 ‘절름발이’다. 적어도 제목과 취지에 비추어보면, 분명히 그렇다. 그래서 불만족스럽다.
이제부터 왜 그런지 찬찬히 살펴보자. “미술 속의 만화, 만화 속의 미술”은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우리 시대의 도상학”, 만화의 캐릭터들이 어떻게 시대를 드러내는 도상이 되었는지, 추적하고 있다. 미술의 경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만화의 컷을 그대로 차용했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텍스트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만화 도상들을 키우고, 비틀고, 늘이는 텍스트들이다. 별달리 새로울 것은 없고, 가장 익숙한 미술의 ‘만화’, 즉 가장 일반적으로 미술이 만화를 전유하는 방식을 되풀이하고 있다. 물론, 만화의 컷들도 전시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구색 이외의 의미는 찾기 어려웠다.
둘째 “말하는 형상”, 이 부분의 기획 의도는 무척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미술과 만화의 형식적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서, 평면 근본주의 때문에 ‘말하는’ 미술이 설자리를 많이 잃어버리긴 했지만, 관객과 맺는 ‘소통’ 관계를 생각한다면, 이야기를 손쉽게 떨쳐내기 힘들었으리라. 하지만 미술과 만화의 말하는 방식은 판이하다. 미술의 방식이 점이라면, 만화의 방식은 선이다. 또한, 미술이 순간을 고정해 이야기를 압축한다면, 만화는 사건을 나열해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아쉬웠다. 차이는커녕, 어중간한 타협밖에 확인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김순기의 <니나노 니나 먹구노나>를 보자. 붓으로 거칠게 그림과 텍스트를 병치했지만, 기묘한 삽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술 쪽으로도, 만화 쪽으로도, 과거로 퇴행한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다만, 안규철의 <모자>는 제법 눈길을 끌었다. 설치를 함께 사용해, 모자를 둘러싼 ‘사건’을 훌륭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안점은 이야기 방식이다. 일체 말을 쓰고 있진 않지만, 수직, 수평, 대각을 이용해 칸과 칸의 관계를, 사건의 인과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렇다고 각각의 이미지가 손상되지 않았으니, 만화와 미술 ‘사이’에서 ‘말하는 형상’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칸과 칸 사이”도 흥미로움와 아쉬움이 교차되긴 비슷했다. 아마, 기획만 놓고 본다면, 네 가지 가운데 가장 잘 선택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만화의 서사성은 이 칸과 칸 사이의 인과 관계로 구축된다. 그런데 다른 예술장르와 달리 흥미롭게도 관객이 이 관계를 구성한다. (그렇다고 이 관계가 ‘상상적으로’ 구축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칸들의 ‘문법’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눈에 띈 텍스트는 주재환의 <몬드리앙의 호텔>이다. 몬드리안의 구성을 차용해, 각각의 부분을 만화의 칸처럼 처리했다. 이 텍스트는 정말이지 흥미로움와 아쉬움의 전형이었다. 흥미로움은 구성의 색깔을 유지시켰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칸들의 관계를 희석시켰다는 점에서, 각각 발생했다. 만약 칸들 사이의 인과 관계를 색깔로 표현한다면, 아니면 최소한 색깔의 성질을 이용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스크린톤으로 색깔을 대체하는 동아시 만화권에서 실험되기 어렵긴 하나, 해볼 만한 가치는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주재환의 텍스트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텍스트는 단순히 인간 군상의 면면을 구성의 부분들에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네 번째 “풍자․상징․기호”는 가장 실망스러웠다. 왜냐하면 이 부분이 전시의 결론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풍자에서 형상의 상징과 기호의 의미의 통합을 확인한다, 나쁘지 않다. 인식론적 전환과 개념적 전복, 이해할 수 있다. 오윤의 판화도, 최호철의 <을지로 순환선>도, 박재동의 시사만화도, 주완수의 풍자만화도, 훌륭한 텍스트들이다. 그럼에도 왜 ‘풍자’가 결론으로 제시되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풍자는 단지 기법일 뿐이다. (문학에서 아이러니를 예술 형식의 원리로 삼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여기서 그 만큼 고민한 흔적은 별로 없다) 과연 예술장르의 형식적 속성을 한 가지 기법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다른 예술에 그런 말을 한다면, 분명 ‘담론적 치도곤’을 당할 것이다. 이점은 만화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공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회화적) 전복과 (양식적) 풍자를 헛갈려선 곤란하지 않을까. 또한, 만화의 경우에 기원(호가스, 도미에)을 들먹이며, 풍자를 고스란히 만화의 속성으로 자리매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기원에 호소하는 오류), 매우 불유쾌하기 짝이 없다. 왜 과거(기원)로 미래(결론)를 대체하는지, 납득하기 힘들다.
끝으로 한 가지 점만 지적하자. 미술은, 미술가들은 곧잘 만화가 ‘시간 예술’이란 점을 고의적으로 잊어버린다. 그들은 단지 만화의 캐릭터가, 만화의 이미지가, 한 마디로 ‘질료’가 필요했을 뿐, 만화 자체를 필요로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점은 팝 아트도 예외가 아니다. 리히텐슈타인은 절대 ‘만화’가 필요했던 게 아니다. 친숙한 일상의 이미지가,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대중들에게 질릴 정도로 익숙한 이미지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 점을 의식했는지, “만화의 소재와 형식을 단순히 차용한 경우 뿐 아니라, 만화 자체의 서술구조와 상징적 의미”를 적용시킨 텍스트를 골랐다고 주장하나, 솔직히 서사성을 담보한 텍스트는 찾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 전시는 ‘미술 속의 만화’일 수는 있어도, ‘만화 속의 미술’은 결코 아니다. 한 마디로, 미술이 만화를 요리하는 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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