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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4일
![]() 1. 바르톨과 바이저의 작업은 이중의 반성을 요구한다. 매체로 무엇을 보여주는 대신에, 매체로 매체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매체가 주체인 것이다. 여기서 이중의 반성인 것은 반성의 결과가 이른바 ‘아날로그’이기 때문이다. 즉 아날로그로 육화된 디지털인 것이다. 그런데 둘의 방식은 사뭇 다르다. 먼저, 그들의 작업을 하나씩 살펴보자. 바르톨의 <Random Screen>은 제목 그대로 무작위화면이다. 디지털픽셀 구조를 본뜬 하얀 격자화면이 있고, 격자에는 촛불이 들어간 알루미늄 캔이 들어 있다. 촛불의 세기에 따라 알루미늄 캔이 회전하는 것과 빛이 점멸하는 속도가 규정된다. <Random Screen>은 픽셀의 기본구조를 느리게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0과 1 사이에 무수한 실수가 숨어 있는 것처럼, 다양한 속도로 점멸하며 디지털의 0과 1의 ‘사이’를 교란하고 ‘빈틈’을 드러낸다. 그것도 전기가 전혀 없이 촛불의 힘만으로 이뤄내므로, ‘디지털의 가면’을 천연덕스럽게 썼다고밖에 할 수 없겠다. 2. 바이저의 <Lucid Phantom Messenger>는 디지털에서 더욱 후퇴한다. 이 작품은 언뜻 보면 무슨 약품을 섞어 놓은 것만 같아서, 매체예술과 별다른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내를 따져보면, <Random Screen> 못지 않게 디지털을 전제하고 야유한다. 우선 액정, 실리콘, 유리섬유 등등, 디지털영상을 생산할 때 필요한 도구와 질료를 유체로 전환한 다음, 유리 그릇에 담는다. 여기에 소프트웨어에 따라 전기자극을 부여해, 알록달록한 유체의 운동이 발생하며, 그에 맞춰 소음이 뒤따른다. 요컨대 전기로 하는 물질의 액션페인팅 퍼포먼스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여느 디지털영상에 비해도 있을 것은 다 있다. 소프트웨어도 있고, 전기도 있고, 액정도 실리콘도 유리섬유도 있다. 그러나 생산된 것은 소음을 동반한 ‘반디지털 유체운동’ 뿐이다. 3. 바르톨과 바이저의 작업은 ‘디지털’로 여과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시민권처럼 작용하여, 그들의 작업이 매체예술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 같다. 물론, 서로의 방식은 다르다. 바르톨이 질료를 전도한다면, 바이저는 형식을 전도(교란)한다. 전기가 없어도 픽셀구조는 구성되고, 전기가 있어도 전자영상이 구현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디지털의 문법을 고려하지 않으면, 작업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디지털의 마법이 그들의 작품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매체・예술 환경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작업에서 일정한 징후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즉 ‘번역’의 문제가 대두된다. 4. 보통 언어에서 번역은 대체로 두 가지 사항을 상정한다. 첫째 공통된 의미. 의미는 특정언어와 무관하게 존재하며, 번역은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둘째 확고한 실재. 의미는 실재를 지시하므로 고정된다. 결국 실재가 의미를 고정하므로, 번역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번역자체가 무력화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 ‘음역된 언어’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번역된 것인가 아닌가. 물론 음역된 언어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오늘날 차이가 있다면, 하나의 언어로 수렴되고 전문담론을 넘어서 일상어까지 침투하며, 개별언어의 구조까지 포식하는 점이다. 페니키아문자는 마치 메타언어라도 되는 것처럼, 언어들의 무의식으로 깊게 자리잡는다. 사실 그것은 경험적으로 이미 메타언어다. 마치 현재의 디지털처럼 말이다. (프로그램약호와 영어는 그래서 동형적이다. 그것들 모두 보편언어를 지향하며, 개별적인 모든 것을 흡수한다.) 5. 번역은 비단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매체들 사이에도 발생한다. 그것은 오늘날 흔히 ‘융합convergence’으로 불리지만, 그렇게 명명하면 일방향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는 벡터만 강조된다. “모든 진리는 자기확장적이다. 어떤 관념이 자기를 진리라고 믿을 때, 그것은 맹렬하게 팽창한다. 주먹만하게 줄어들었다가 크게 폭발한 우주처럼.”(김현) 자연스럽게 매체들 위의 ‘매체’가 상정되고, 이른바 디지털의 복음이 울려퍼진다. 컴퓨터의 불랙박스가 다스리는 섭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의 문제는 은폐될 수밖에. 6. ‘번역’은 그 점을 상쇄하며, 매체들 ‘사이’를 짚어준다. 대등한 관계를 설정한다. 결국 바르톨과 바이저는 바로 관계를 드러내고, 번역자체를 질료로 삼아 반성한다. 여기서 흥미로롭고도 기이하는 것은 아날로그매체가 별달리 사유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벤야민처럼 예외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정작 아날로그매체가 등장하던 시기에도 아날로그매체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담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박영욱, ꡔ매체, 매체예술 그리고 철학ꡕ, 향연, 148) 거칠게 말해서 아날로그는 디지털로 여과된 다음에야 ‘생산’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키틀러처럼 중요한 예외도 존재한다.) 그것도 디지털로 수렴되기 위한 것으로서 자체의 특정성을 말살당한 채로서. 이제 컴퓨터로 처리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럽게 아날로그의 딱지가 붙게 되었다. 한마디로 아날로그는 디지털을 구성하기 위한 대당으로서 호명된 셈이다. 그리하여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범주는 물질과 정신의 전통적 이원론을 기술적으로 계승하게 된다. 7. 바르톨과 바이저는 번역을 함으로써, 번역에 저항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의 작업은 디지털 육화처럼 역설로도, 음역된 언어로만 구성된 시처럼 암호로도 보인다. “테크노미학은 기계의 미학으로서 그 힘을 상실한 모든 휴머니즘들을 일소하고, 테크놀로지적 반자연Antiphysis 현상의 유희공간들을 확장시킨다.”(볼츠) 대가는 분명히 치른 것 같다. 여기에는 해석할 의미도 공감할 감정도 없는 것만은 분명하니까. 그것을 반성적 유희로 부를지 유희적 반성으로 부를지 뭐가 됐든지 말이다. <기술미학연구회> 5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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