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14일
![]() 1. 모든 것을 덮을 만큼 크게 보였던 시절이 있었다. 덮고도 남아서 주체를 못할 정도의 과잉의 난무들. 생각도 과잉이고 감정도 과잉이었다. 강요받은 선택 때문에 허우적거려도 인정받지 못하던 불행아들은 얼마나 많았던지. 견디지 못한 사람은 조용히 사라졌고 결국은 잊혀졌다. 진보의 이미지가 그랬다. 무겁게 둘러싸고 매섭게 떨궈냈다. 그것은 그래도 필요한 과잉이었다. 무엇이 창피했는지 가방에 숨겨뒀던 <타임즈>와 공연히 옆구리에 끼었던 사회과학 서적은, 위태롭게 공존하던 시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벽한 형세역전. 한때 상종가를 달리던 진보의 브랜드가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두의 대열은 흩어졌다. 진보도 잊혀질 차례가, 반품될 상품이 된 것이다. 위기 때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잘 팔릴 때 세상은 친구로 넘쳐 나지만, 안 팔릴 때 세상은 외면하기 일쑤다. 그렇게 이탈하는 패잔병의 무리는 점점 불어났고, 깃발은 어느새 조용히 내려졌다. 이렇듯 한산해진 가두에서 너무 늙지도 너무 젊지도 않은 한명의 키드가 외로이 서있다. 그런 탓에, 그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어쩐지 물어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것은 예정된 불화의 길, 연출된 수난의 길이 그 앞에 쭉 깔려 있기 때문이다. ![]() 이곳 저곳에서 이미지를 차용하고 자신을 집어넣은 다음에 멀찍이 관람하는 것 혹은 조롱하는 것, 이번에도 옥정호는 자신이 애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른바 자기 사진 몸소 찍기self portraits 덧붙여 약간의 변주는 덤. 지금까지 그는 다분히 정치적・사회적 약호를 변환하는 전략을 꾸준히 구사했다. 이 전략은 한국에도 몇몇 작가를 주축으로 나름의 작은 역사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형식상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형식의 ‘의미’를 되새기며 작품을 보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작가라면, 더구나 변환전략의 시대적 조건이 바뀌었다면, 더욱 세심히 관찰해야 할 것이다. 형식이란 결국 질료(현실)의 논리이므로,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형식의 의미는 재배치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제하고,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우선 패러디다. 대상은 사람일 수도 상징일 수도 사건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 경계가 분명치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조습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연출하며, 과거를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웃기게 재현하고 재연한다. 옥정호는 <옥정호전>(2005)에서 자신을 출연시켜 가면서, 역사적・문화적・사회적 상징 같은 것의 약호를 변환시켰다. 이번 <Free Plastic>에서 주목할 것은 친숙한 영화이미지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전작과 비교해 보면, 적지 않은 변화로 봐야 한다. 그가 단계를 구분할 만큼의 시간의 두께를 쌓은 것도 아니고, 질료가 균일하게 전개된 것도 아니지만, 그가 사용하는 질료를 변화시킨 만큼의 ‘간격’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술사 데이빗 카퍼필드를 활용했던 <오신 걸 환영합니다>(2005)처럼 이전에도 재현을 끌어들인 작업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화이미지를 아예 전면으로 배치했다. 그것은 독일까 약일까. 작업과정을 따져보면,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옥정호에게 원본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패러디란 원본the original에 기생하여 생성되기 마련, 무엇보다 반복과 차이에 의존한다. 즉 패러디의 기생은 원본의 반복에, 패러디의 생성은 원본과의 차이에 각각 의존한다. 따라서 원본은 패러디의 존재조건으로 전제된다. 그렇게 보면 옥정호는 현실을 재현하는 영화를 인용한 셈인데, 지적대로 현실에서 재현으로 이동한 만큼 자기지칭의 폐쇄회로에 갇힐 공산이 커지게 된다. 재현의 재현이란, 자칫하다가 말들의 놀이로 흐르거나 대상 없이 용어만 지칭하는 외국어사전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인지 저랬기 때문인지, <캐스트 어웨이>를 제외하고, <킬빌>의 일본도, <JSA>의 살인현장, <넘버3>의 재떨이, <올드보이>의 장도리를 언급하며, 전시서문은 영화의 이미지에서 폭력을 드러내는 상징을 읽어내자고 제안한다. 솔직히 말해보자. 이들 작업에서 폭력・권력의 우의가 얼마나 작동하는지, 과연 그런 의도에 따라서 배치되었는지, 질료가 어떤 식으로 연속되어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더러,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인용의 사슬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장담하기 어렵지 않을까. ‘중국산 딱지’가 얼마나 묘기를 부릴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것만으로 작품이 외부와 맺는 관계를, 작품들 내부와 맺는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비슷한 무엇이 있다면, 기껏해야 외삽된 딱지들의 동일성뿐이리라. ![]() “역사의 세속적인 전개는 세계의 고통의 역사다.”(벤야민) 다음 논점은 수난극이다. 원래 고대의 수난극은 예수의 수난 전후를 다룬 종교극이었지만, 중세에 바로크비극이 전통을 이어받으며 흥미롭게 변주됐다. 고귀한 존재인 영웅이 절묘하게 배역을 갈아타기 때문이다. 고대비극에서 주인공은 고귀한 존재로서, 미처 모르는 사이에 과오를 저질러 바닥까지 하강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세상과 화해할 계기가 마련된다. 그는 외부에서 불어 닥친 고난을 감내하고, 운명・필연성에 승복・승화한다. 하지만 바로크비극에서 고귀한 왕은 박해자이자 수난자이다. 스스로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 자기학대극을 연출하는 기묘한 존재다. 스스로 고립된 존재에게, 자기를 학대하는 존재에게, 세계(바깥)는 화해의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물론, 세계 또한 죽어 있으므로, 왕에게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둘 다 서로에게 갈 길이 막혀 있다는 것이다. (왕의 곁에 광대가 있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한쪽은 과도하게 우울하고 한쪽은 과도하게 쾌활하고, 한쪽은 말이 없고 한쪽은 말이 많고 등등. 광대는 왕의 분신이 아니던가) 이러한 구조는 현대의 옥정호에서 다시 한번 하강 변주된다. 바로크비극에서 주인공은 그래도 왕이었다. 비록 세상과 불화한다지만, 그런 불화를 이겨낼 권력을 보유한 자다. 일개 시민인 옥정호에게 그런 힘이 있을 리 만무하니, 그에게 있는 것이라곤 텍스트 밖에 없다. 하기야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텍스트 안쪽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뻔뻔한 자기학살극을 연출한 그의 얼굴엔 모르는 척 만면에 근엄이 가득하다(<China Town>). 그렇다. 세상에서 고립된 왕은, 근대에 야무지게 진보를 꿈꾸었던 주체는, 이제 텍스트 안쪽 깊숙이 난쟁이 꼬마가 되어 피신하게 된다. 그의 세계는 정말로 축소되며, 거기서 왕과 광대는 기어코 하나로 통일된다. (이러한 계열은 단지 옥정호만 해당되진 않는다. 개인들마다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연출하곤 있지만, 현실을 무대로 만들고 스스로 무대의 광대고 되고 기꺼이 변사를 하면서 세상과 자기를 조롱하는 약호들은 일정한 징후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 “무리 속에 살아가는 자의 명예는 무리와 함께 있다…무리가 존속하는 한 설사 무리로부터 이탈되었다 해도 늘 그는 무리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오시이 마모루) 무리를 이탈한 늑대에게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목적을 상실한 게릴라는 어디에 거처를 마련해야 할까. 그는 이제 겨우 떠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에게 지금 묻는 것은 조금은 온당치 못할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하자. 고향을 잃어버린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못하는 법이라는 것을. 그곳을 그래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새긴다면, 과거든 향수든 미래든 낙원이든, 방향을 붙잡을 나침반이 필요하다는 것을. <abc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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